[NEWS & VIEW] "학원이 만들던 대학 배치표 교사 손으로"

조선일보
  • 안석배 기자
    입력 2009.11.16 03:05

    사교육과 '진학 안내' 경쟁

    협의회 조효완 공동대표(은광여고 고3 부장교사)
    수능 후 첫 주말,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칼바람'을 뚫고 사교육업체들이 마련한 입시설명회를 찾아다니느라 바빴다. 입시설명회에서는 대입지원 전략을 설명하고 이른바 '대학 배치표'를 학부모들에게 나눠줬다. '○○점이면 △△대 영어교육과 지원가능' 같은 내용을 포함한 '대학 배치표'는 수능 가(假)채점 점수로 지원가능한 대학을 점쳐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원래 수험생들의 대학 선택은 진학 담당 교사들이 조언을 해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학교가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험생들은 배치표에 의지해 응시할 대학을 선택했고, 대학과 학과의 서열은 배치표 거의 그대로 결정됐다. 대학배치표는 대한민국 교육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사교육의 권력'을 상징했다.

    전국 고교의 진학담당 교사들이 "학원에 빼앗긴 학교의 역할을 찾아오겠다"고 나섰다. 고3 교사 700여명이 회원 가입한 전국진학지도협의회는 15일 "학교가 해야 할 대입 상담일을 학원들이 맡아왔다"며 "일선 학교 데이터를 취합해 우리가 더 품질 높은 대입 가이드(대학 배치기준)를 만들어 내놓겠다"고 말했다. 700여명 교사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학교 현장에서 얻은 고3 제자들의 성적 정보를 토대로 학원보다 정확한 가이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협의회는 당장 올해는 전국 16개 시·도 지역별로, 내년부터는 전국을 통합한 대입 가이드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만든 대입 가이드는 이번 주 중 전국 고교에 일제히 배포된다.

    협의회는 “수험생들이 학교 담임교사나 진학교사를 찾아가면, 이 가이드를 통해 진학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협의회 조효완 공동대표(은광여고 고3 부장교사)는 “학교 교사들이 낸 자료로 사교육과 경쟁하면 학생들은 더욱 양질(量質)의 대입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입시 배치 기준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유는.

    “그동안 사교육업체마다 배치표 기준이 들쭉날쭉했다. 예컨대 A기관 것은 상위그룹 학생에 잘 맞고, B기관은 중위그룹에 정확한 경향이 있었다. 전국 고교 데이터를 모아서 상담프로그램을 만들어 일선 학교에 내려보낼 예정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그동안 학원 배치표를 의지해 온 것은 학교의 입시 상담보다 낫다는 의미 아닌가.

    “사교육의 장점은 인정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학원의 노하우를 많이 배울 것이다. 사교육 배치표를 완전히 없애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분(대학 배치표)에 있어 일선 학교는 그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도 제대로 해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전국진학지도협의회는 올 1월 출범했다. 모임을 만든 이유에 대해 조 대표는 “위기감과 반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교육이 지난 수십년간 대학 입시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온 것을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스스로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1994년 수능이 도입되고 입시가 복잡해지면서 일부 교사들은 입시안도 잘 모른 채 관행적으로 학원 대입 배치표를 받아서 진학 지도를 했다는 것이다. 조 대표는 “일부 고3 교사들은 입시를 너무 몰라 학생들이 피해를 입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교사들이 사교육 배치 기준표의 기준에 종속되는 결과가 나타났어요. 스스로 아이들 진학 상담을 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요.”

    대입 배치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부작용도 있었다. 1980년대엔 대학들이 입시기관에 커트 라인을 높여달라고 로비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 교육계 인사는 전했다. 조 대표는 “우리가 대입 배치 기준을 만들겠다는 것은 진학 상담을 학교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교육 배치표를 무시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조 대표는 말했다. 그는 “그동안 공교육이 못한 일을 사교육이 했다면 이를 인정해야 하며, 공교육이 자극을 받아 사교육보다 더 잘할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조 대표는 “입시에서 부유한 가정 아이들이 유리해지는 현상은 학교 교사들의 책임도 많다”며 “열정과 실력으로 수업하고 진학 상담을 하는 교사들이 많이 나와 가정 배경이 대입에 미치는 영향력을 줄여나가도록 하는 일이 이 시대 교사들의 사명 아니겠냐”고 말했다.

    인터뷰 도중 한 사교육업체에서 보낸 홍보 메시지가 기자 휴대전화로 날라왔다. ‘서울 ○○에서 입시설명회를 엽니다.’ 앞에 앉은 조 대표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학교 교사들의 노력이 부족해서 이런 것 아니겠어요. 이제부터는 우리가 제대로 해낼 겁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