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전용차로의 '아찔한 과속'

입력 2009.11.13 00:30 | 수정 2009.11.13 02:50

안전거리·속도 무시하며 밤만되면 줄줄이 고속질주
톨게이트서도 시속 90㎞ 차에서 술마시며 춤까지…
버스 추돌 대형사고 잇따라

어둠이 내리자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는 '과속 전용차로'로 변하기 시작했다. 낮 시간 동안 규정 속도를 지키던 버스들이 하나 둘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시속 130㎞을 넘나들며 굉음을 내고 질주하는 전세·관광버스도 있었다. 지난 10일 오후부터 12일 새벽까지 돌아본 수도권 일대 고속도로의 낮과 밤 모습은 야누스와 같았다.

11일 오후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죽전휴게소 출구 부근(부산기점 399㎞ 지점). 4㎞ 뒤쪽 수원IC 근처부터 차로가 4개에서 5개로 늘어나면서 차량들이 속도를 내기 좋은 직선 구간이다. 고속도로순찰대 1지구대 대원들과 함께 오후 4시15분부터 1시간 동안 이동식 단속 카메라로 버스 운행속도를 측정했다. 시속 100㎞인 최고 제한속도를 크게 넘는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4분쯤 시속 112㎞를 찍은 S관광버스가 눈에 띄는 정도였다.

오후 6시, 날이 저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현격히 높아진 차량 속도가 느껴졌다. 레이저를 이용하는 경찰의 이동식 카메라는 해가 지자 힘을 쓰지 못했다. 4~5차로의 옆에 있는 갓길에서 조명을 터뜨려도 1차로를 쏜살처럼 내달리는 버스의 속도를 제대로 측정할 수 없었다. 고정식 무인 단속 장비의 위치를 훤히 꿰뚫고 있는 운전자들에게 마지막 걱정거리가 사라진 셈이다.

오후 8시가 지나면서 차내에 사이키 조명을 번쩍이며 1차로를 달리는 전세버스가 자주 보였다. 당일치기 관광을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차량이다. "시속 120㎞가 넘겠는데요." 박대종(38) 경장이 말했다. "승용차처럼 시속 130~140㎞으로 '쏘지는' 못하지만 차체가 무거운 버스는 시속 120㎞만 돼도 속도감이 엄청나거든요."

12일 오전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달래내 고개 부근에서 경기지방경찰청 고속도로순찰대 소속 경찰관이 이동식 카메라로 과속 버스의 속도를 측정하고 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오후 9시, 버스 전용차로 제한이 풀리면서 1차로로 진입하는 승용차들이 많아졌다. 앞으로 끼어드는 승용차를 막기 위해 상향등을 켜대며 급가속한 버스 때문에 아찔한 상황이 이어졌다. 시속 110㎞ 가까운 속도로 달리면서 일행 차량과 차 간 거리를 바싹 좁힌 '줄줄이 운행' 버스의 행렬이 위태로워 보였다. 전방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대형 연쇄추돌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김효준(43) 경사가 "한 대라도 삐끗하면 큰일"이라며 "도로 곳곳에 '대열 운행은 대형 사고의 원인'이라는 경고 문구를 붙여놓아도 운전기사들 눈에는 안 들어오는 것 같다"고 했다.

박천수(54)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시속 100㎞로 달리는 차량은 최소 100m의 안전거리를 두는 것이 상식"이라면서 "승용차보다 차고(車高)가 높은 버스는 급제동할 때 좌우 쏠림이나 흔들림 현상이 심해 안전거리를 더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운행기록계를 꼼꼼히 체크해 과속 운전자에 불이익을 주는 고속버스와 달리, 전세·관광버스는 이에 대한 관리 감독이 느슨하거나 아예 없어 과속이 특히 심했다.

관광버스 운전사 정모(46)씨는 "기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시까지 서울에 도착할 수 있나' '해가 졌는데 빨리 안 가고 뭐 하냐'고 화내는 나들이객 때문에 가속 페달을 안 밟을 수 없다"고 했다.

휴게소에서 만난 한 운전자는 "과속 버스의 엔진은 십중팔구 불법으로 '풀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차량 속도가 기준치 이상으로 올라가면 엔진의 연료 분사량을 조절해 과속을 방지하는 장치를 몰래 조작한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올 들어 전국 주요도로에서 무인 단속기에 적발된 승합차 45만8251대 중 사업용 승합 차량은 모두 5만9508대였다. 이 중 상당수가 고속버스나 관광·전세버스로 추정된다.

지난 9월 4일 오전 경부고속도로 양재 나들목에서 서울 방면으로 600m떨어진 지점에서 버스 4중 추돌사고가 발생했다.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관광버스가 속도를 줄이던 광역버스를 들이받고 그 충격으로 앞선 차량 2대가 밀려 부딪힌 사건이다. 서울 나들이를 가던 노인 등 30여명이 다쳤다.

지난달 31일에는 강원도 원주시 영동고속도로 서울 방면 121㎞ 지점에서 관광버스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 같은 날 원주시 호저면 중앙고속도로 춘천방면 고속도로 순찰대 인근에서는 관광버스가 앞서 가던 관광버스를 들이받아 10여명이 다쳤다.

하이패스 구간을 통과하는 버스들의 과속 운전도 심각했다. 12일 오전 6시 서울 톨게이트에선 통근버스와 광역버스, 고속버스가 달려오던 탄력을 거의 줄이지 않고 하이패스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10일 밤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호법분기점 부근을 지나는 관광버스 안에서 술 취한 승객들이 춤을 추고 있다./이준헌 객원기자

이제광(42) 경사가 답답한 표정을 했다. "얼른 봐도 시속 80~90㎞는 돼 보이죠? 하이패스를 지날 때 시속 30㎞ 이하로 감속해 달라고 아무리 홍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고속도로 곳곳에서 단풍놀이철을 맞아 차 안에서 춤판·술판을 벌이며 쏜살같이 내달리는 관광버스를 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승객은 안전벨트를 풀고 좁은 버스 통로에 서서 춤을 추며 정신을 놓고 있었다.

10일 오후 8시10분, 서시원(42) 경사가 영동고속도로 서울 방면 이천 IC 부근에서 '불량' 관광버스를 포착했다. 요란한 음악 소리가 달리는 차 밖으로 들렸다. 등산복 차림의 중년 남녀 7~8명이 버스 통로에서 '디스코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운전석 옆 아이스박스 위에는 소주병과 종이컵이 보였다.

술 취한 남자 승객이 "야, 이××야" 하고 단속 경찰에 욕설을 퍼부었다. 이병만(47) 경사는 "삿대질을 하거나 멱살을 잡는 취객 등 별 사람이 다 있다"고 했다.

승객들이 차 안에서 운전에 방해가 될 정도로 음주가무를 벌일 경우 운전자는 벌점 40점, 면허정지 40일에 범칙금 10만원 처분을 받는다. 운전기사 정모(44)씨는 "(벌점 없는) 다른 걸로 해 주면 안 되느냐"고 통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올 들어 '난폭 운전과 차내 가무' 혐의로 단속된 승합차는 7566건에 달했다. 매달 600~800여건꼴이었다. 지난달에는 830건으로 올 들어 최고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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