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227]

조선일보
    입력 2009.11.09 02:45

    제19장 하얼빈의 열하루

    방 안의 작은 책상 위에 앉은 안중근은 붉은 줄이 그인 양면괘지를 펴고 한시(漢詩)로 자신의 감회를 풀어나갔다.

    장부가 세상을 살아감이여, 그 뜻이 크도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시대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 또한 시대를 만들리니.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우뚝 천하를 노려봄이여, 어느 날에 큰일을 이루리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동풍은 갈수록 차가운데, 장사의 의기 오히려 뜨겁도다.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분개하여 한번 떠남이여, 반드시 그 뜻을 이루리로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쥐 같은 도적 이등이여,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 (鼠竊伊藤兮 豈肯比命)

    이리될 줄 알았으랴만,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노라.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동포여, 동포여, 하루빨리 대업을 이룰지어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만세, 만세를 외침이여, 대한독립을 위함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년 또 만만년을 이어가라. 우리 대한동포여. (萬歲萬萬歲 大韓同胞)

    일러스트 김지혁
    안중근은 간투사(間投詞) 혜(兮)를 되풀이하여 초사(楚辭)풍으로 비장하게 풀어나가되 진부한 격조나 소소한 운율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써놓고 보니 스스로도 숙연해져 몇 번이고 소리 없이 읊어 보고 있는데, 담배를 피우고 있던 우덕순이 안중근의 등 뒤로 와서 함께 보다가 말했다.

    "내가 글이 짧아 스스로 시문을 지어 즐길 만큼은 못 되지만 읽어 대강 그 뜻을 짐작할 만은 하오. 동지의 시를 보니 태산 같은 기개와 충절이 절로 가슴을 짓눌러 오는구려. 비록 언문이나마 나도 보구(報仇)의 심사를 한 구절 읊고 싶소."

    그리고는 안중근이 비워준 책상에 앉아 방금 쓴 장부가(丈夫歌)를 찢어낸 양면괘지에 한글로 길게 적어나갔다. 뒷날 의거가(義擧歌) 또는 보구가(報仇歌)로 이름 붙여진 가사였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평생 한 번 만나기가 왜 그리도 어렵던가./

    너를 한 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몇천리를/ 천신만고 거듭하여 가시성을 더듬었다./

    혹은 윤선(輪船) 혹은 화차 청국노국 방황할 때/ 해님께 기도하며 예수님께 경배하며/

    보살피사 도우소서 동(東)반도 대한제국을/ 보살펴 주소서 원컨대 내 뜻을 도와주소서./

    오호라 간악한 늙은 도적 이등박문아/ 우리와 우리 민족 이천만인을 멸종한 뒤에/

    삼천리금수강산을 소리 없이 뺏으려고/ 흉악하고 참담한 수단 십(十)강국을 속여서/

    내장을 다 뽑아먹고도 그 무슨 부족에/ 그 욕심 채우려고 쥐새끼처럼 뛰어다니며/

    누구를 또 속이고 누구 땅을 또 뺏으려는가….

    안중근이 어깨너머로 보니 우덕순은 큰 글씨로 괘지 한 장을 채우고도 끝없이 이어갔다.

    그때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유동하가 왠지 심통이 난 듯한 얼굴로 들어왔다.

    "김성백씨가 학교에 없어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미 밤이 깊었으니 오늘 저녁은 그분이 돌아온다 해도 돈 얘기 하기는 틀린 것 같고…."

    외투를 벗으며 유동하가 그렇게 성의없이 하는 말을 듣고 안중근이 물었다.

    "왠지 돈 빌리는 일을 민망하게 여기는 것 같소. 혹시 아직 혼인식도 치르지 않은 사가(査家)에서 돈을 빌리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으시오?"

    "그것도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나는 내일이나 모레는 약이나 사서 프그라니차나야로 돌아가야 할 성싶은데, 그사이에 전보를 친들 대동공보사가 돈을 보내 사가의 빚을 갚는 걸 보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안을 보고 빌려주는 돈이라 그렇습니다."

    이에 안중근은 우덕순에게서 종이와 만년필을 받아 대동공보사의 이강 앞으로 보내는 전보 내용을 적어주고 다시 간곡한 편지 한 장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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