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논설실장

김제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시기는 김대중 정권 때다. "전국 10대 권역 중 오로지 군산-장항권역에만 공항이 없다." 지역 소외감이 엄지손가락으로 꼽히는 낙점 재료였다. 지금 그곳은 채소밭으로 변했다. 귀신 승객만 들락거릴지 모른다는 감사원 지적에 2년 전 공사를 중단했다. 토지 수용에 들어간 500억원은 배추·무 뿌리 아래 묻혔다.

피 같은 세금이 썩는 줄 알면서도 공항 유치 1등공신이라며 표를 훑어간 정치인 중 누구도 반성이나 사과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채소 풍년을 달성, 농가소득 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치적 홍보 내용을 바꾸면 그만일 것이다.

이쯤 해서 포기하면 한국 정치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보다 담대한 꿈을 유권자에게 팔아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새만금을 두바이처럼 만들려면 김제나 군산에 국제공항이 절실하다' '공항 부지를 몇 배 늘려 산업단지로 전환하겠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빈칸은 나 몰라라'하며 유유자적하는 악취미 정치인이 의외로 많다. 표만 챙기고 개발 계획이 어떻게 가든 무책임하다. 공터를 보면서도 세금이 얼마 들어가도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 정치 엔터테인먼트만 고속 성장해왔다.

외국 기업을 유치하겠다고 아우성이어서 경제특구(경제자유지역)로 지정해주고 나면 공장 아닌 잡초를 키운다. 기업도시를 지정해 주었더니 성급하게 들어선 미분양 아파트엔 거미줄만 얽힌다.

경제가 고속 성장 궤도에서 벗어난 지 벌써 20여년이다. 지방에 만들어진 공항이나 공단, 신도시 중 알차게 꼭 채워진 곳은 없다. 외국인 전용공단엔 빈 공간이 더 넓고, 한산한 11개 지방공항은 만년 적자다.

송도국제도시가 그래도 성공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파트 값이 뛴다고 법석이고 투자 가이드가 요란하다. 잭 니클라우스가 직접 설계했다는 골프장의 간판과 국제학교 건물이 조금은 이채롭다.

하지만 상하이 푸둥처럼 '국제'라는 수식어를 송도에 보태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글로벌 기업의 간판이나 이국인을 마주치기란 힘들다. 외국인에게 1000여 아파트를 특별 분양하겠다며 온갖 특혜를 받아갔지만, 고작 6채 팔렸다고 들린다.

분당 일산과 마찬가지로 송도도 같은 방식으로 빈 공간을 채웠다. 아파트 오피스텔 투자에 앞장선 아줌마 세력이 송도를 메워준 금메달급 공로자다. 자산의 8할을 부동산에 집어넣는 개미 세력이 없다면 어떤 신도시나 어떤 단지도 채워지지 않는 게 한국 경제의 오늘이다.

송도가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로지 버블만이 철부지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선을 그은 곳에서 빈칸을 채울 수 있을 뿐, 몇개 정부 부처나 재벌 기업, SKY대학이 빈 공간을 메워줄 수 있는 경제가 아니다.

세종시 논쟁에서 빠진 것은 이것이다. 정부 부처를 보내고, 기업을 보내고, 대학을 보내겠다고 큰소리치는 정치인이 널려 있다. 분당, 일산, 송도 때도 내걸었다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자족(自足)도시 구상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부 부처는 꽁무니 빼고, 후보 기업들은 '그 비싼 땅에 무슨 공장인가. 아예 수백억원을 지역 발전기금으로 던지는 편이 낫겠다'고 뾰로통하다. 대학은 '정부가 땅을 무상 제공하고 강의실 건축비를 대주겠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인다.

채워지지 않을 빈칸 메우기 게임에서 주전 선수들이 발을 빼는 현실을 제쳐 놓은 채, 정치인들은 정치 신의(信義)와 신뢰를 앞세우고 여야 합의를 말한다. 지역 소외감이라는 김제공항식 정서(情緖)도 빠지지 않는 양념이다.

그렇다면 양양국제공항은 정치 신뢰와 합의를 깡그리 저버렸다가 국제노선 하나 없는 공항으로 전락했을까. 18인승 꼬마 비행기가 매일 한두 번 뜨는 그곳에서는 여전히 4차선 진입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하루 평균 2000만원꼴의 헌금성 세금을 적자 막음 용도로 다른 지역 주민들이 꼬박꼬박 입금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잠재 성장률이 3%대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아무리 한국 정부가 유능하고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높여 봤자, 신도시와 공단을 채워주던 고속 성장은 미신이요 망상이라는 말이다.

저성장과 함께 인구도 문제다. 한때는 해마다 대구시가 하나씩 탄생했었다. 그런 인구 폭발이 값싼 공장 근로자와 번잡한 이동 인구를 공급해주던 시절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기업과 사람이 펑펑 늘면서 '형님 좋고 동생 좋던' 경제판이 아니다. 줄어든 피자 조각을 저 동네가 챙겨가 버리면 이쪽은 황폐해지고 만다. 구미시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그때마다 김천 인구는 300명, 500명씩 줄어들고, 광양만 개발에 사람을 빼앗기는 구례군은 더 황량해지고 있다. 세종시 주변에서 벌어질 증상도 뻔하다.

지도 위에 신도시, 신공단, 신공항 따위를 그리기 전에, 그리고 정치 신뢰와 합의를 앞세우기 전에, 정치 지도자라면 경제 성장 속도와 출생률부터 봐야 한다. 나뭇가지 위의 참새를 유혹할 기술이라도 있다면 중국 동남아로 눈이 완전히 돌아가 버린 기업인 마음부터 되돌려 놓고 볼 일이다. '나부터 자녀 하나 더 낳겠다'는 정치인이 나오면 더 반갑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