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45] 100년 전 외국인 눈에 비친 우리 모습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입력 : 2009.10.30 22:26 | 수정 : 2009.10.31 02:12

    1909. 8. 29.~1910. 8. 29.

    한말 우리 신문에는 사진이 없었다. 사진이 실리지 않았으니 사진기자가 있을 리 없다. 개화기 우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서양인과 일본인이 찍은 것이다. 갓 쓰고 장죽을 문 게을러 보이는 남자들,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 앞에서 노는 쑥스러운 표정의 어린이들.… 대부분 오늘의 우리 눈에 미개하게 보이는 모습이다.

    아래 그림은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사진기자 로버트 던(R. L. Dunn)이 찍은 사진을 모사(模寫)한 것이다. 미국 화보잡지 '콜리어스'(1904.3.26.)와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뉴스'(1904.4.9.)에 이 그림이 실렸다. 당시 사진기술이 떨어져 사진과 똑같이 그린 그림을 많이 사용했다. 침략군의 보급품을 져나르는 불쌍한 한국인과 의기양양한 일본군인이 대비되는 울화통 터지는 장면이다. 잡지에 한 번 실린 사진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며, 그것이 전달하는 부정적인 잔상(殘像)도 지워지지 않는다.

    위의 그림은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사진기자 로버트 던(R. L. Dunn)이 찍은 사진을 모사(模寫)한 것이다.
    19세기 후반까지 한국은 문명세계에서 낙후되고 국제무대와 단절되었으며, 서방에 '가장 덜 알려진'(G. N. Curzon, 1894) 나라였다. 1876년 개항을 전후해서 양인들의 방한이 늘어났지만, 한국은 여전히 '금단의 나라'(Ernest Oppert, 1880), '은자(隱者)의 나라'(W. E. Griffis, 1882)였다. 미국의 천문학자 로웰(Percival Lowell)이 '고요한 아침의나라'(1885)로 불렀던 것이 조선을 상징하는 가장 친숙한 표현으로 정착되었다.

    영국 성공회가 발행하여 세계 각국에 배포한 영문잡지 '모닝캄'(1890.7.~ 1939.10.)은 선교용 종교잡지였지만 한국의 존재를 알린 홍보대사 역할도 했다. 88서울올림픽 포스터에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멀리 로웰의 저서와 성공회의 잡지에 연원이 올라간다.

    서방이 우리를 주목한 큰 사건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었다. 두 싸움에서 한반도의 주인 행세를 못하는 우리에게 동정적인 눈길을 보내는 서양 언론은 드물었다. 열강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질 뿐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일본인들은 서울에서 '생영관(生影館)', '봉선관(鳳仙館)', '옥천당(玉川堂)'과 같은 상호로 사진관 영업을 시작했다. 한국인이 하는 사진관은 1907년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문을 연 '천연당(天然堂)'이 최초였다. 김규진은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웠는데 여자 고객에게는 여자 사진사가 안방에서 찍도록 배려했다. 이 같은 영업전략이 주효하여 1908년 음력정월에는 사진을 찍는 내외국 남녀가 1천여명에 달해서 미처 수용할 겨를이 없었다(대한매일신보, 1908.3.4.). 그러나 사진대금을 내지 않는 사람이 많아 3년 뒤에는 문을 닫을 지경이 되는 어려움에 봉착한 일도 있다. 1910년 미국에서 컬러인쇄술과 사진학을 공부한 이종찬이 김규진과 동업을 위해 필요한 기자재를 수입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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