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접는 학도 종류가 1000가지 넘는 거 알아요? 날개 꼬부라진 학, 마주보는 쌍학, 긴 종이로 10마리를 연달아서 접는 방법…. 일본에는 종이 비행기 접는 법만 책 한 권이에요."

김영만(金永萬·59)이 눈앞에서 색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우리 친구들, 오늘은 움직이는 토끼를 만들어 볼까요?" 하는 80~90년대 TV 유치원 프로그램이 시작될 것 같았다.

오늘 주제는 '왕관 비행기'. "이렇게 한 번 두 번…. 이제 접힌 대로 병풍접기 하세요." 몇번 손놀림에 색종이가 원통형 왕관으로 변했다. "이게 무게중심이 앞에 있어서 던지면 잘 날아가요. 한번 볼래요?"

인터뷰 내내 그의 큰 목소리가 귀를 때리고 머리를 울렸다. 평생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같은 말을 반복하고 제스처가 많아졌 다. 1년 내내 25벌 청바지만 입는다는 그에게 아이들은 순수함을 선물했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종이접기 1인자

"그때 시청률이 어마어마했어요. 20~25% 나오던 때였으니까요. 엄마들이 'TV 유치원 한다'고만 하면 잠자던 아이들도 벌떡 일어나곤 했으니, 아이들 세계에서 스타가 된 거죠."

그는 1988년도부터 KBS의 'TV 유치원 하나, 둘, 셋'에 출연했다. 프로그램 말미에 5분간 종이접기를 가르치는 코너였다. '춤추는 도깨비' '말하는 꿀꿀이' 등 움직이는 장난감을 색종이와 나무젓가락, 종이컵만으로 뚝딱 만들어냈다.

10여년 넘게 KBS의 '혼자서도 잘해요', EBS의 '딩동댕 유치원' 같은 유아 프로그램에 출연해 종이접기 열풍을 불러온 그는 국내 종이접기 1인자다. 22년간 직접 개발한 아이템만 1만여 가지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일본, 미국, 유럽을 들락거리며 자료 조사해 개발한 것들이다. 이는 지금도 스크랩 북에 만드는 순서 그대로 빼곡히 스케치가 돼 있다. 그동안 종이접기 책만 6권, 비디오테이프만 16개를 냈다.

그는 "뭐든 다 접을 수 있다."며 "말만 하라"고 했다. 20년 넘게 전국 유치원과 미술학원, 대학에서 강의하다 보니 "이제 그 정도는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8년째 수원여대 아동미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989년에 지인들과 만든 한국종이접기협회도 계속 하고 있다. 그가 TV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종이 강아지를 만들고 하트 모양을 접었던 아이들은 어느새 엄마가 됐다. 그 엄마들이 다시 자신의 아이들을 김영만에게 보낸다.

그는 지난해 9월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아트 오뜨'라는 체험 미술관을 만들었다. 그림 그리기, 만들기, 종이접기 등 1일 체험을 할 수 있는 일종의 '미술 놀이터'다. 지금까지 유치원과 어린이집 아이들 1만여명이 다녀갔다.

"선생님은 진짜 다 접을 수 있어요? 아이들이 제일 많이 하는 질문이에요. '뭐 접어줄까?' 말하면 '평화!' 이래요. 그 순수함에 저는 지금도 애들한테 '뿅' 가요." 환갑의 나이에도 그가 색종이와 가위를 놓지 않는 이유다.

꽃 접는 방법만 책으로 10권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보냈다. 마당에 분수가 있었고 1960년대부터 가정교사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만화책을 좋아하던 그는 나갔다 하면 미술대회에서 상을 타왔다.

당시 잘 나가는 집안 아이들만 간다는 서울예고에 진학한 뒤 서양화를 전공했다. 정통 화가가 되려 할 때 아버지 회사가 망했다. 1969년 홍익대 미대 도안과(산업디자인과)에 입학한 것도 돈벌이 때문이었다.

등록금은 겨울 한 철 동기들과 크리스마스카드를 팔아 충당했다. 그는 "우리는 터치만 넣어도 그림이 되지 않느냐"며 "백화점과 극장 앞에서 촛불을 깔아놓고 만들기가 무섭게 연인들에게 팔았다"고 했다.

졸업 후 대우전자 광고 선전실에 취직했다. 5년 만에 나왔다. 그는 "과장이 되자 명색이 '그림쟁이'인데 드로잉 대신 결재만 하는 생활이 따분했다"고 했다. 개인 광고 사무실을 차리려 조사차 일본에 갔을 때 인생이 바뀌었다.

1981년 31살 때 일이었다. "조형놀이 코너에 종이접기 책이 쌓여 있더라고요. 그때까지 종이접기라고 해봤자 학이나 비행기 정도라고 알고 있었는데 일본에는 꽃접기만 책으로 10권이 되더라고요. 충격이었습니다."

국내에 돌아와 유치원을 몇 군데 돌아다녀 본 뒤 '이거다' 싶은 확신이 더 강해졌다. 그는 "칠판에 코끼리를 그려놓고 이대로 그리라는 식의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국내 조형놀이 수준은 황무지였던 것이다.

이듬해 일본에 돌아가 종이접기 협회의 3개월 코스를 이수한 뒤 한국에 돌아왔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야겠다는 조바심에 과천에 미술학원부터 차렸다. "과천 미술학원 원장이 조형놀이를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났다.

색종이, 풀, 가위…

방송 출연이 시작되면서부터 그의 아이디어 싸움도 시작됐다. 기존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싫어 100% 개발한 것만 방송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5번 이상 접는 아이템은 피했다.

담당 PD는 "아이들은 모르니 내년 이맘때쯤 똑같은 것으로 방송하라"고 했지만 그는 "아이디어가 고갈 되면 방송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운전을 하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차를 세우고 지갑의 돈을 꺼내 종이접기를 했다.

식당에서 나오는 젓가락 포장지도 훌륭한 소재였다. "어디 앉았다 하면 손으로는 뭘 접고 있어요. 접다 보면 '어, 이건 용처럼 생겼네, 이건 딱지네?' 하는 거예요.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시간 날 때 다시 새로운 모양으로 개발하지요."

방송을 시작하면서는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이미 색종이라고 하면 이미지가 여자인 거예요." 그는 "38살 나이에 방송에서 색종이를 오리고 풀로 붙이고 앉아 있으니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

서울예고, 홍대 미대 동창들에게도 그는 조롱거리였다. "너 요즘 종이접기한다며?" "그런 걸 왜 하냐? 돈 되냐?"는 말이 싫어 동창회 나가기도 꺼려졌다. 순수미술을 하는 동창들은 "코흘리개 돈이나 뺏는다"며 비웃었다.

김영만은 "그저 책이란 책은 죄다 일본 것 일색이었던 국내 조형놀이 분야를 개척하고 싶었다"며 "남들이 '고스톱'이나 골프를 취미생활로 삼는 것처럼 나는 종이접기를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각 도에 이런 체험 미술관을 만든 뒤 죽기 전에 어릴 때 꿈을 살려 유화 전시회 한 번 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다. 20년 넘도록 종이접기 전시회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만들었다 하면 강의장이건 스튜디오에서건 "아이들 갖다준다"며 다들 가져가는 통에 그의 작품은 머릿속에만 남았다. 종이접기 1인자는 뭐든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는 "이 자리에서 시키면 채 50가지도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간단해도 순서 외우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1만개쯤 내가 개발을 했는데, 이걸 더 발전시켜서 보다 다양하게 조형놀이 분야를 이끌 사람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게 내 선에서 끝나게 생겨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