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핵(北核) 의제에도 못 올릴 정상회담이라면 생각도 말라

조선일보
입력 2009.10.18 23:19

미국 국방부 고위관계자가 지난 14일 브리핑에서 "우리는 지금 갑작스럽게 북한이 (입장을 바꿔) 우호적으로 나오는 단계에 도달했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평양을 방문해달라고 초청했고,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북한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오는 22일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 참석하는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일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달 초 베이징에서 열린 이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의 한·중(韓·中) 정상회담과, 지난 8월 23일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가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을 만났을 때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남북정상회담도 할 수 있다'는 원론적 차원의 언급이 있었을 뿐 실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원자바오 총리와 김기남 비서를 통해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맞다는 이야기다.

이 관계자는 "우리가 정보 공유 차원에서 미측에 (북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달했는데 미국 내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남북정상회담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미국측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청와대는 지난 8월 이 대통령과 김기남 비서의 면담에서 남북정상회담 언급이 있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외교안보수석실 명의의 해명 자료를 내 "남북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일절 거론된 바 없다"고 부인했었다. 그것을 미국 국방부 관계자가 이번 브리핑에서 공개해 버린 셈이다.

과거 동·서독 정상들은 수시로 만나 양자 간에 걸린 각종 현안을 놓고 직접 담판을 벌였다. 그러나 남북 정상은 지난 2000년과 2007년에 열린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 최대 현안인 북핵 문제를 피해갔다. 남북정상회담을 역사에 남을 치적(治績)으로 여기고 오로지 회담의 성사만을 위해 북한이 원치 않는 주제는 꺼내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북한 핵을 우회(迂廻)해 남북관계 진전을 꾀할 방법은 없다. 지금 북한의 핵은 남북 교류 확대나 상호 협력을 막고 있는 최대 장애물이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껏 자신들에 대한 정치·안보적 보장과 대북 지원 등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쥔 후에야 핵 폐기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한 번도 굽힌 적이 없다. 북핵 문제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과 해결할 사안이라는 주장도 처음과 그대로다. 결국 현 시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은 북한 핵 문제는 회담 주제에 올리지도 못한 채 '우리 민족끼리'라는 정치적 수사학(修辭學)을 앞세운 북한에 경제지원이나 약속하는 선심 잔치밖에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번처럼 진지하지도 않게 그저 지나가는 식의 북한측 남북정상회담 제의에 한·미가 허둥댈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북한의 제안을 공개하고 이에 대한 우리측의 분명한 원칙과 입장을 천명해 오해가 없도록 하는 게 정도(正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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