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중독된 한국-13] 세계는 지금 '언어전쟁' 중

  • 표언복 교수(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입력 2009.10.15 13:54 | 수정 2009.10.18 17:48

    이명박 대통령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가 2009년 10월 9일 청와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이 대통령이 북핵 일괄타결 방안으로 제안한 그랜드 바겐에 대해 "아주 정확하고 올바르다"며 지지의사를 나타냈다.
    조선닷컴은 지난달 10회에 걸친 ‘외국어에 중독된 한국’ 연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외국어 오남용 실태를 파헤쳤다. 한글날이 있는 10월에는 그 해독(解毒)을 위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제안과 제언을 들어본다. / 편집자 주

    여러 견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인류사회의 언어는 모두 6,500여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해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영국의 언어학자 A. 달비의『언어의 종말』에 의하면 이중 절반인 약 2500개의 언어가 21세기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평균 2주에 1개의 언어가 사라지는 셈이다.

    앞서 알래스카 페어뱅크대의 마이클 크리우스 교수 등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6500여종의 언어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언어가 한 세기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유네스코도 몇해 전 ‘언어지도’를 발표하면서 세계 3000개의 언어가 사멸위기에 놓여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힘 있는 언어만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약육강식의 법칙’이다.

    이런 가운데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각기 제 나라 언어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가히 ‘언어전쟁’이라 할 만한 국면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언어전쟁은 두 가지 모습으로 벌어지고 있다. 하나는 제 나라 안에서 제 나라 말과 글을 순화하고 그 격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 밖에서 제 나라 말과 글을 보다 널리 쓰이도록 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러시아 하원인 국가두마는 지난 2003년 2월, 대중연설 . 언론보도 . 광고 등에서 비속어를 쓰거나, 적절한 러시아어 표현을 두고도 외래어를 쓰는 것 등을 금지하는 ‘모국어순화법’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뒤에 지나치게 극단적이라 하여 상원에서 부결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어 순화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2005년 이스라엘 방문을 앞둔 독일의 쾰러 대통령은 의회에서 독일어로 연설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어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네덜란드어 . 프랑스어 . 독일어 등이 함께 쓰이고 있는 벨기에에서는 심각한 언어갈등 때문에 국가분립론이 제기될 정도에 이르러 있다.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일깨워 주는 단적인 예라 할 만하다.

    프랑스는 국가차원의 자국어 보호정책에 단연 모범적인 국가로 꼽힌다. 지난 1994년 ‘투봉법’을 제정하여 모든 방송 . 광고 . 기업 등에서 프랑스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국민들의 언어사용 실태를 감독하는 ‘언어경찰’제 같은 것을 두어 자국어 오.남용 현장을 적발해 법률적 제재를 가하기도 한다. 2005년 프랑스 베르사유 법원은 회사 문서에 프랑스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미국계 의료기기 업체에 시정명령을 내렸다. 프랑스에서 사업하려면 외국기업도 프랑스어를 쓰라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국가가 이러니 프랑스인들의 자국어 사랑도 남다른 데가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 지사는 재임시절 “프랑스어는 국제어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비하했다가 도쿄시내의 프랑스인 21명으로부터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를 당한 바 있다. 각종 국제회의에서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일본어 사용을 고집하여 종종 물의를 빚는 일본과 외신기자들 대상의 ‘브리핑’에 그들의 표준어인 부통화(普通話)만을 쓰는 중국의 자국어 정책도 부럽기 그지없다.

    언어경쟁은 나라 밖에서 더욱 뜨겁다. 자기식 영어 사용권을 넓히기 위한 미국과 영국 사이의 무한경쟁은 아주 오래 전부터의 일이거니와, 자국어 사용인구를 늘리기 위한 국가간의 경쟁은 가히 ‘총성 없는 전쟁’에 비유될 만하다.

    중국은 지난 2004년, ‘해외 중국어교육 지원센터’를 설치하고 중국어 학습거점인 ‘공자학원’을 앞세워 중국어를 세계어로 보급하려는 전략을 추진중이다. 중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을 2005년 기준 3000만 명에서 2010년까지 1억 명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에 질세라 일본에서는 해외 일본어 학습시설을 2007년 기준 10개국 10곳에서 100곳 이상으로 늘린다는 계획을 추진중이다. 일본 언론은 이를 중국이 중국어 학습거점을 늘려 가는 데 대항하려는 의도라고 보도했다. 프랑스는 이미 2007년 기준 무려 950개의 해외 프랑스어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국은 126개에 달한다.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얼핏보기에 우리의 말글정책도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갖가지 규범이 갖추어져 있고, 지난 2005년에는 ‘국어기본법’도 제정되어 시행하고 있다. 아직 앞서 가는 나라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우리도 ‘세종학당’을 두어 외국인에 대한 한국어 교육을 지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9일 이명박 대통령은 2015년까지 세종학당을 150개까지 늘리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문제는 진정성이며 의지이다. 말글 생활에 관련된 갖가지 법령을 제정한 주체이면서 오히려 우리 말글질서를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국가 공공기관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통령이 내세운 대북제안은 ‘그랜드 바겐’이고 총리실의 광고 이름은 ‘새만금 글로벌 네이밍 공모’이다.

    지금 우리 국가 공공기관들은 우리말, 우리글로 생각하고 표현하기를 큰 수치로 여기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국어기본법은 벌써 아무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법령이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속에서 지금 우리의 말 글 환경은 혼돈과 무질서의 극에 달해 있고 국어와 한글은 전에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국가 공공기관들이 국어와 한글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일은 한글날을 공휴일로 삼고 세종학당의 수를 늘리는 일보다 백배 천배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표언복 교수는 목원대를 졸업하고 건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목원대 사범대 학장으로 재임 중이며 저서로 ‘내방가사연구’, ‘한국고전문학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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