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휴전선 북쪽 DMZ… 4000km(총연장) '地下만리장성'이 있다

    입력 : 2009.10.10 03:30 | 수정 : 2009.10.10 11:51

    6·25 때 중공·북한군이 건설
    한반도 동서로 '허리' 파헤쳐… '마지노선' 능가하는 거대 요새

    환경부는 비무장지대 생태계 합동조사단을 꾸려 조사한 결과 "광활한 자연경관과 습지 생태계가 잘 발달해 보전가치가 뛰어나다"고 4일 발표했다. (본지 10월 5일자 보도)

    비무장지대의 자연 밑에는 총길이 4000㎞의 거대한 요새가 있다. 휴전선 북쪽 비무장지대에 있는 이 요새는 임진강 하구~강원도 고성을 관통한다. 2차 세계대전 때의 마지노선(프랑스)이나 서부방벽(독일)을 능가하는 규모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이름은 '지하만리장성(地下萬里長城)', 6·25 때 북한군과 함께 요새를 만든 중공군이 붙였다. 이 지하 장성은 최근 이기환씨의 한양대 석사학위 논문 '비무장지대 일원 유산의 보전방안 연구' 등을 통해 베일을 벗고 있다.

    중공군은 1951년 8월부터 진지 구축에 나섰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른 뒤 1949년 새 정부를 출범시킨 입장에서 경제전쟁과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 어려워 낸 아이디어였다.

    화력이 우세한 유엔군의 폭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라면 동굴 형태여야 했다. 10월 중공군 사령부는 "거점은 반드시 갱도(坑道)식으로 확보하되 깊이는 5m 이상으로 파라"고 지시했다.

    공사는 전(全) 전선으로 확대됐다. 고지 뒤쪽 비탈부터 파내려가 안에 그물 모양 통로와 포좌(砲座)를 만들었다. 임무와 지형에 따라 말발굽, 방사선, 입(入)자, 정(丁)자형으로 팠고 주요 거점은 2층으로 만들었다.

    방공(防空), 방호(防護), 방독(防毒), 방수(防水), 방화(放火), 방습(防濕), 방한(防寒)의 '7방(防)'이 공사의 원칙이었다. 폭약은 유엔군의 불발탄으로 만들고 주위에는 철공소까지 세워 삽과 곡괭이를 제작했다.

    중공군측 기록은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하기 위해 손수레를 만들었다. 낮에 흙을 동굴 입구까지 옮겼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틀 때까지 공사를 계속했다"고 했다.

    중국군사과학원 2005년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과 북한군은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횡(橫)으로 가로지르는 250㎞의 전선 곳곳에 지하갱도, 즉 '땅굴'을 거점으로 한 요새를 만들었다.

    총길이 287㎞에 이르는 9519개의 통로와 총길이 3683㎞에 이르는 78만4600개의 참호가 만들어졌다. 폭탄대피소와 지휘소·관측소·토치카는 10만1500개나 됐다. 서해~동해안까지 폭 20~30㎞의 거대한 개미집이 만들어진 형상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 선집' 제15권은 '지하만리장성'에 대해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와 강당이 있어 생활이 대단히 편했다"고 써 놓았다. 하지만 땅굴 안 사정은 열악했다.

    식수가 부족해 병사들은 혀가 갈라지고 코피를 쏟기도 했다. 야맹증 환자가 급증했다. 중공군은 민간요법에 따라 솔잎을 1시간씩 삶아 1주일간 마시거나 개구리 알을 물에 넣고 끓여 먹기도 했다고 한다.

    유엔군이 폭탄과 화염방사기로 공격할 때 땅굴 안은 최악의 상황이 됐다. "화약 냄새, 독가스, 피비린내, 대·소변 냄새, 땀 냄새가 갱도 안에 가득 차 숨쉬기가 극도로 곤란해질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공군의 '땅굴작전'은 곧 위력을 발휘했다. 1952년 10월부터 김화 오성산 인근에서 벌어진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는 2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났다. 그런데도 유엔군은 저격능선 일각만 확보하는 데서 그쳤다.

    중공군은 6·25 전쟁 중‘지하만리장성’으로 알려진 거대한 갱도 요새를 만든 뒤 그 속에서 생활하며 작전을 펼쳤다. / 눈빛출판사 제공
    당시 전투를 지휘한 정일권(丁一權) 국군 제2사단장의 회고다. "입구는 작은 구멍인데 안에 들어가 보니 사통팔달이었다. 중공군의 반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동굴 진지에 숨어 있다가 들어온 것이었다."

    1952년 6~8월의 불모고지 전투 때 한 일본 기자는 "네이팜탄 투하 30분 뒤 공산군 진지에서 박격포가 날아왔다"며 기겁했다. 저격능선·삼각고지 전투는 중국에서는 '상감령(上甘領) 전투'로 알려졌고 대승으로 미화됐다.

    당시 중국인들은 '상감령 대첩'에 열광했고 대륙 곳곳에서 보낸 편지와 위문품이 땅굴로 쏟아졌다. 1950년대 중국에선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의지'라는 '상감령 정신'이 일세를 풍미했다고 한다.

    1956년에는 이 전투를 소재로 한 중국 영화 '상감령'이 개봉됐는데 영화 끝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애창곡이 됐다.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도 이 노래가 불렸다.

    '지하만리장성'의 전술은 6·25 후 북한군에 고스란히 전수됐고 훗날 '땅굴작전'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지금도 휴전선 북쪽인 김화 오성산 일대에는 유사시에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시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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