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203]

조선일보
    입력 2009.10.06 03:46

    제17장 패주(敗走)

    "당신들은 여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가시오. 이걸 가지고 한걸음이라도 빨리 여기서 멀어지는 게 피차간 모두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오. 어제 이 아랫마을에 일본 병정들이 몰려와서 죄 없는 양민을 다섯이나 묶어서 끌고 가더니, 의병들에게 밥을 주었다는 구실로 그 모두를 쏴 죽여 버렸소. 이곳도 때때로 와서 뒤지니 공연히 지체해서는 아니 되오. 이리밖에 대접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 나는 당신들을 보지 못했소."

    좁쌀 밥이 든 바가지를 내밀면서 그렇게 말하는 집주인의 얼굴은 겁에 질려 시퍼��다. 그걸 본 안중근 일행은 더 말을 붙여볼 엄두를 못 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밥 바가지만 받아들고 산속으로 되돌아가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눠 먹었다. 소금 한 톨 없이 계곡물로 목을 축이며 먹는 조밥이었지만, 그처럼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음식은 하늘나라 신선들이 드나드는 식당의 요리일 것이오. 이 세상 어디에 이보다 더 맛난 음식이 있겠소!"

    안중근은 그런 감탄까지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이미 밥을 굶은 지 엿새가 지나 있었다. 거기다가 지난번 마지막 식사도 이틀이나 굶은 뒤 얻어먹은 보리밥 한 그릇뿐이었다.

    집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 말고는 말 한마디 못 붙이고 떠나는 바람에 길을 물을 틈이 없어, 안중근 일행은 다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산속을 헤매게 되었다. 북쪽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산이 가로막으면 산을 넘고 물을 만나면 물을 건너가는데, 언제나 밤에는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밤이 되면 걸었다. 어느 만큼은 장마가 끝날 때도 되었건만, 날마다 비가 그치지 않고 퍼부어 고생은 더욱 심했다.

    일러스트=김지혁

    낮에는 빗속에 떨며 숲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면 굶주림에 뒤틀린 속을 냇물로 달래며 걷기를 며칠, 다시 안중근을 비롯한 세 사람은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다시 숲 속에서 인가 한 채를 만나자, 이번에도 안중근이 홀로 나서 죽기를 무릅쓰고 그 집 문을 두드렸다. 마침 집주인이 조선 사람이었으나, 심성은 앞서 만났던 산골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행색을 보니 이번에 노서아에서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그 의병 패거리로구나. 더구나 너는 틀림없이 노서아에 입적(入籍:여기서는 귀화)한 자일 것인데, 한번 러시아 놈이 되었으면 거기서 구구로 머리 박고 살 것이지 의병 질은 무슨 의병 질이냐? 노서아 앞잡이가 되어 국경을 어지럽히고, 동족들을 못살게 구니 차라리 너를 잡아 일본 군대에 넘겨야겠다!"

    안중근을 보자마자 그렇게 소리치더니 미리 준비하고 있던 몽둥이를 둘러메며 집안에 대고 소리쳤다.

    "이보라우, 날래 나오기요. 여기 노서아에서 왔다는 그 종간나 새끼 하나가 밥 빌러 왔음메. 후딱 묶어다 일본군한테 넘기고 설라무니, 어제 죄 없이 잡혀간 양지 뜸 순동이나 풀어 달라 합세."

    그 말에 방안에 있던 서넛이 우르르 문을 열고 달려나왔다. 그때는 이미 세 사람 모두 총과 탄약조차 제대로 챙기고 있지 못했다. 겨우 한 자루 남긴 연발총과 탄알 몇 발이 있었으나, 그나마 숲 속에 남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빈손인 안중근으로서는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밥은 얻지 못하고 몽둥이찜질만 당한 안중근이 허둥지둥 달아나 두 사람에게 돌아가니, 두 사람도 놀라 안중근을 따라나섰다. 추위나 굶주림보다는 코앞에 닥친 화를 피하는 게 급해 다시 어디가 어딘지 모를 밤길을 가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일본말로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좁아지는 산길로, 그 길목 보초막을 지키던 일본군이 수하(誰何)를 묻는 소리 같았다.

    안중근이 퍼뜩 앞을 살피니 여남은 발자국 앞에 총검이 번쩍이는 총을 메고 있던 시커먼 그림자가 소총을 벗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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