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터뷰] '싸우는 리버럴리스트' 강상중 도쿄대 교수

    입력 : 2009.10.05 03:59 | 수정 : 2009.10.05 04:14

    "한국 젊은이들, 미국의 쇠퇴를 보며 국가의 앞날 고민해야"
    도쿄의 올림픽 추진은 도쿄 시민조차 이해 못해
    부산과 공동개최 하는'동북아 올림픽'은 해볼만
    한국도 大연립 통해 對北기본정책 세워야…
    그래야 흔들림 적어지고 젊은이도 정치에 관심 보여

    2006년 8월 30일. 한국인 강상중(姜尙中)이 연단에 섰다.

    "도쿄올림픽의 영광을 한 번 더? 이것으로 세계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자(富者)의,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 올림픽으로 어떤 울림을 세계에 전하겠습니까?"

    2016년 여름 올림픽 개최를 위한 일본의 후보 도시를 선정하는 회의에서, 그는 도쿄와 맞붙은 후쿠오카(福岡) 응원단에 있었다. 돈을 앞세운 도쿄의 힘에 결국 밀렸지만 그의 이 한마디는 어떤 일본 유력인사들보다 호소력이 강했다.

    지난달 30일 강상중 도쿄대 교수를 만났다. 올림픽 개최 도시를 최종 결정하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를 사흘 앞둔 시점이었으나 이미 도쿄의 실패는 확정적이었다.

    도쿄대 연구실에서 만난 강상중 교수는 반공(反共)의 의미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반공’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가장 옳은 길이었다”고 했다./도쿄=선우정 특파원 su@chosun.com
    ―후쿠오카였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모르지요. 부산과 공동 개최로 가는 '동북아 올림픽'이라는 구상이었으니까요. 함께 후쿠오카 응원단에 참여한 건축가 이소자키씨와 같은 접근법이었어요. 현해탄을 동북아의 내해(內海)로 만들자는. 먼저 후쿠오카를 일본 대표로 만들고 부산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지요." 세계적인 건축가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씨는 후쿠오카가 속한 규슈(九州)의 오이타(大分)현 출신, 재일동포 2세인 강 교수는 규슈의 구마모토(熊本)현 출신이다.

    ―후쿠오카 구상은 다시 추진해볼 만한 프로젝트입니다. 부산도 움직임이 있는 듯합니다.

    "도쿄에서 올림픽을 다시 치르자는 구상은 도쿄 시민들조차 왜 추진하는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일본이 정권 교체를 이뤘으니, 2002년 한일월드컵과 같은 역사를 다시 진행해볼 만하지요."

    강 교수는 대학 시절 일본명 '나가노 데쓰오'를 버리고 본명 '강상중'으로 새 인생을 시작해, 일본 사회에서 강력한 발언력을 구축했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도쿄대 교수에 처음 임용돼, 일본 주류의 우파 그룹에 맞서 초지일관 재일동포 권익을 주장해온 그를, 일본의 거물 평론가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總一朗)씨는 "싸우는 리버럴리스트"라고 평가했다.

    ―(동북아 올림픽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의 '동북아 공동체' 이념과도 맞습니다. 중국 상하이(上海)도 끌어들일 만하지요.

    "시기적으로 좋습니다. 빌리 브란트(무릎 꿇고 사죄한 옛 서독 총리)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토야마 총리가 옛 서대문형무소나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해 일본이 잘못했다는 뜻만 확실히 전하면, 천황 방한도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천황은 정말로 한국에 가고 싶어합니다. 내년(경술국치 100년)이 역사적인 해이니, 국회 결의나 총리 방한을 통해 역사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실히 하는 것도 좋겠지요. 천황 방한이 성공하면, (재일동포의 숙원인) 지방참정권 부여도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일본어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일왕을 '덴노·天皇'라고 호칭했다. 말한 그대로 기사에 옮긴다.)

    ―한국은 민주국가입니다. 통제가 가능했던 1992년 중국(10월 천황 방중)과 달리, 데모나 항의가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도 이런 모습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춰야겠지요.

    "'지금 있는 그대로의 한국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감을 일본이 어떻게 갖추는가의 문제이겠지요. 그런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 노력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일본의 정권 교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지금 민주당을 이끄는 사람들은 옛 자민당 사람들입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한국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일본은 정치권에 뭔가 공감대가 있지요.

    "한국도 대북·대미·대일 정책의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최소한의 플랫폼(platform)이지요. 옛 서독 모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빌리 브란트 시대의 동방정책은 대(大)연립을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한국도 대연립을 통해 기본적인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윙(흔들림)이 적어지고 젊은이들도 정치에 건전한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서울대에서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으셨지요.

    "그들의 정치 이탈, 정치 무관심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서 '고민하는 힘'에서 21세기를 '울(鬱·우울)의 시대'로 정의하면서, 일본의 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로부터 좌표를 찾으려 했습니다.

    "소세키가 고민하던 시대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대륙으로 향하던 때였습니다. 침략의 길이었지요. 모두 '강국이 됐다'고 좋아할 때, '큰 나라의 길을 걸으면 불행이 기다린다'고 고뇌한 사람이 소세키였습니다. 극동의 작은 나라가 제국이 됐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은 이솝우화의 '배 터진 개구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큰길을 가지 말고 섬나라에서 생활의 풍요를 찾자, 분수에 맞는 국가를 만들자는 철학이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영국에서 유학(1900~1902년)했기 때문이지요. 그가 런던에 머물던 '세기의 전환기'에 당시 대영제국은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로 할 국가의 모델인가?' (제국의 실상을 모르던 일본 내 지식인과 달리) 실상을 본 그는 고뇌했습니다. 우리는 100년 전 소세키의 입장입니다. 이번 세기의 전환기에서 쇠퇴하는 미국을 보고 있지요. 같은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극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한국이야말로 지금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초조해할 뿐이지요. 열강에서 탈락할까 봐 좌불안석이었던 100년 전의 일본처럼.

    "서로를 배려해 주지 않습니다. 삭막해지는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야말로 세태를 말해 주지요. 386세대의 한계가 노정된 것입니다."

    ―교수님의 대학 시절(1970년대 초반)이야말로 일본은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전 반공(反共)에서 출발했습니다. 좌익 전성기에. (이 촌스럽고 구닥다리 같은 '반공'이란 단어를 '싸우는 리버럴리스트'에게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대학(와세다대) 시절 대만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와 함께 대학에서 전 '마이너리티'였죠. 마오쩌둥 만세를 부르던 때였지요. 용공(容共)이랄까, 좌익에 물든 사람들이 많았어요. '좌익 소아병(극단적으로 나가기 쉬운 성향)'이 유행하던 시절에 우리는 '우익 소아병자'로 불렸지요. 조총련에서 접근했지만 전부 거절했습니다."

    ―유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좋은 선배 덕분이지요. 제가 몸담은 재일한국인 그룹 '한국학생동맹'의 리더였습니다. 그는 '반공이 아니면 우리들의 레종데트르(Raison d'�ttre·존재 이유)는 없다'고 했지요. (당시 우리가 존경하던) 김대중씨도 기본적으로 반공이라고."

    ―왜 반공이었습니까?

    "전 '한국 카테고리' 안에 있습니다. 이념이 아니라 조국이지요. 한국은 반공을 토대로 성립한 나라입니다. 4·19 때 학생들은 '우리는 적색 독재에 반대한다. 그러니까 백색 독재에도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학생운동은 일본의 좌익운동과 다르지요. 조국을 구한다는, 애국운동이었습니다. 올바른 방향이었지요. 우리는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길을 갔기 때문에 지금 일본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재일동포들이 '조국'이란 개념에 매달리는 듯합니다. 한국의 젊은이에겐 피상적인 관념이 돼가고 있지요.

    "아버지, 어머니의 고난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어도, 전쟁을 치렀어도 한국에선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재일동포 1세들은 자신을 죽여야 하는 고난을 겪었어요. 한국인이란 것을 말하지 못하고 일본 사람들 안에서 가면(假面)과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하고 자신의 프라이드, 존엄성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지요. 그들을 보았기 때문에 조국을 더 절실히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막스 베버(Max Weber)를 연구하셨지요.

    "베버와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가 좋았습니다. 베버는 마르크스 비판을 굽히지 않았지요. 독일혁명 때도 (좌익 혁명가였던)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베버는 옳았습니다. 저는 1979년 서독에서 유학하면서 반공을 기반으로 국가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르크스-레닌에 대한 반대 위에서 사회민주주의이든, 리버럴이든 성립할 수 있었지요."

    ―일본 지식인들은 북한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를 비난하고 김일성을 감싸는 식이었지요. 1980년대 이후 한국 학생운동도 일본처럼 변질했습니다.

    "일본은 6·25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경제적 특수(特需)만 누렸습니다. 행복한 나라였지요. 일본은 한국을 통해 북한을 접했을 뿐입니다. 학생들은 완전한 온실 속에서 이상한 환상만 가지고 있었지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들이 북한을 알게 된 계기는?

    "북한으로 간 재일동포 소식이 전해져 온 다음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 알았던 재일동포 1세가 혼자 (북한에) 갔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요. 제 부모님은 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박치기'란 영화는 당시 재일동포의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영웅(英雄) 대망론'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약한가, 강했으면 좋겠다는 열망은 차별을 받던 재일동포들에게 특히 강했지요. 이런 심리를 북한이 '김일성 신화'를 통해 잘 이용한 것이지요."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일종의 '민족 청소'였습니다. 일본 보수 그룹이 조총련과 손을 잡고 사업을 주도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지요.

    "당시 재일동포 생활보호대상자 수가 일본인의 5~10배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가 스스로 일본에서 나가줬으면 했지요. 북한조차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보낸 사람들의 책임도 있겠지요."

    ―지금은 '한류(韓流)'란 현상이 일고 있습니다. 교수님은 최근 자신의 인생과 철학을 담은 '강류(姜流·일본어 발음이 한류와 동일)'란 책을 내 좋은 반응을 얻었지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어프로치가 한국을 향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차별하던 사람들이 이번엔…. 하지만 (한류라고 해도) 일본인은 한국의 진정한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겪은 것, 우리가 존재하는 곳, 우리들의 뿌리에 있는 '한(恨)'의 의미를 일본 사람들에게 좀더 알려야겠지요."

    ☞ 강상중은?

    강상중 도쿄대 교수(대학원 정보학환·環)는 국적과 상관없이 일본 사회에 강한 발언력을 가진 지식인이다. 인권과 소수(少數)를 앞세우는 리버럴한 성향이지만, 이념과 당파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었다. 논리적인 언어 구사 능력으로 상당수 지지자를 확보해 '고민하는 힘'(2008년) '애국의 작법'(2006년) '자이니치'(在日·2004년) 등 저서를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렸고, 최근 자신의 인생과 철학을 다룬 '강류(姜流)'란 책도 출간했다.

    1950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경상도 출신 부모는 1931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1972년 대학생 시절, 한국을 방문한 뒤 일본 이름을 버리고 본명 '강상중'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이란 가면을 벗고, 한국인으로서 새로운 인생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79년부터 3년 동안 서독 유학을 경험하면서 '반공(反共)'을 토대로 국가 체제를 구축한 독일식 합리주의를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그의 첫 저서는 '막스 베버와 근대'(1986년). 베버를 학문적 스승으로 삼은 그는 공산주의와 금융 만능의 미국식 자본주의를 동시에 비판해 왔다. 스스로를 '리버럴 반공'이라고 규정한다. 국제기독교대학(ICU)을 거쳐 1996년부터 도쿄대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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