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201]

    입력 : 2009.10.02 03:10

    제17장 패주(敗走)

    "여기가 어디요? 누구 아시는 분 있소?"

    안중근이 아직도 장대비 속에 밝아오는 낯선 산자락을 살피다가 시퍼런 입술을 덜덜거리며 따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대꾸할 힘조차 없다는 듯 무겁게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밤새도록 걸었으니 전날 떠난 곳에서 몇십 리는 갔을 터이지만,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친 세 사람은 거기서 잠시 다리를 쉬며 주변을 살펴보기로 했다. 날이 더 밝아지면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 멀리까지 살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날이 밝아도 사방을 분간할 수 없기는 새벽 어스름 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고 두터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고 땅 위에는 안개가 자우룩하게 덮여 앞뒤 좌우로 스무 발자국 앞을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그들이 헤매고 있는 산등성이는 높고 가팔랐으며, 내려다보이는 골짜기는 깊고 험했다. 밭 한 뙈기 일굴 만한 비탈조차 없는 것이, 도대체 인가가 붙을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그 산등성이에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낮에 북쪽이 되는 곳을 보아 두었다가 밤이 되면 무턱대고 그리로 걸었다.

    그렇게 산속을 헤매는 사이에 너댓새가 지나갔다. 음력 오뉴월의 장맛비는 줄곧 노드리듯 쏟아지는데 한군데서도 인가는 어디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비 한번 긋지 못하고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한 채 걷자니 추위와 배고픔만으로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어두운 산길을 쫓기느라 신은 벗겨져 맨발이요, 입성은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에 찢기고 해져 거지라도 상거지 꼴이니, 그 고생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안중근과 그를 따르는 두 사람은 낙담하여 허물어지지 않았다. 낮이면 풀뿌리를 캐어 먹고 익지도 않은 머루 다래를 훑어 주린 배를 달래며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두만강이 있는 북쪽으로 길을 찾아 나아갔다. 한 장 남은 담요를 찢어 부르트고 찢긴 발을 싸매고, 서로 지켜주고 보살피며 걸으니 고생스러움이 한결 덜어지는 듯했다. 어느 밤 그렇게 어렵게 어두운 산길을 더듬어 가는데, 문득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러스트 김지혁
    "개 짖는 소리로 미루어 인가가 멀지 않은 듯하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는지 모르니, 내가 먼저 저 집으로 가서 알아본 뒤에 밥도 얻고 길도 물어 돌아오겠소. 두 사람은 숲 속에 숨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무슨 변고가 있으면 둘만이라도 피하도록 하시오."

    안중근이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고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어둠 속을 더듬어 내려가 보았다. 한참을 내려가니 한군데 인가인 듯 불빛이 빤한 곳이 있었다. 하도 오랜만에 만나는 인가라 반가운 나머지 경계심이 풀린 안중근이 막 뛰어나가려는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며 횃불을 든 사람 몇이 몰려나왔다. 개 짖는 소리에 불려나온 듯했다.

    불빛에 화들짝 정신이 돌아온 안중근은 얼른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횃불을 앞세우고 나온 것은 장총을 움켜잡은 일본군 병사 둘이었다. 그러고 보니 집도 여느 민가가 아니라, 통나무와 돌로 든든하게 세운 수비대 초소였다. 아직 보이지는 않지만 짖고 있는 개도 일본군이 기르는 군견(軍犬) 같았다.

    안중근은 급히 두 사람에게로 돌아가 사태를 알리고 함께 몸을 피했다. 무턱대고 일본군 초소와는 반대방향으로 산길을 기며 구르며 달아나는데. 이미 너댓새나 굶주리고 추위에 떤 몸이라 그런지 움직이기가 여간 무겁지 않았다. 겨우 추격을 벗어났다 싶자 기력이 다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뒤에 먼저 정신을 차린 안중근이 가만히 하늘에 대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전지전능하신 천주 예수여, 죽어도 속히 죽고 살아도 속히 살게 해주소서!"

    그리고는 가까운 개울을 찾아 배가 부르도록 물을 마신 뒤 풀이 무성한 나무 아래 누워서 남은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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