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기중기' 이봉걸(52)이 돌아왔다. 이만기(46·인제대 교수), 이준희(52·개인사업)와 함께 씨름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이봉걸이 신생 에너라이프 씨름팀의 감독을 맡아, 1일 진주 추석장사씨름대회에 출전한다. 에너라이프는 지난 4일 공식 창단한 팀이다.
이봉걸 감독이 지도자가 된 것은 1990년 은퇴 이후 처음이다. 신출내기 감독으로 신생팀의 첫 대회를 책임지게 된 '왕년의 천하장사'를 지난 29일 진주에서 만났다. "은퇴하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힘들게 씨름판에 돌아온 거 후회 없이 한번 해보렵니다."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불행했던 '인간 기중기'
이 감독은 '일등 조연'이었다. 1985년 데뷔한 그는 2m5의 거구 탓에 주로 '악역(惡役)'이었다. 씨름팬들은 약 20㎝나 작은 이만기·이준희에게 이봉걸이 당하는 모습에 손뼉을 쳤다. 그래도 이 감독은 "그때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내가 한 번씩 이기면 그게 또 반전(反轉)이었죠. 사람들이 내가 불쌍했는지, 나도 얼마나 좋아해 줬는데요." 이 감독은 2번의 천하장사 타이틀을 얻고 1990년 은퇴했다.
하지만 모래판을 떠난 이봉걸은 불운했다. 은퇴 후 쭉 지도자를 꿈꿨지만, 1990년대 이후 몰락해가는 씨름판에서 그를 찾는 감독 자리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죽염·건강식품 등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지만 모두 실패했다. 사기를 당해 거액을 날리기도 했다. 2006년엔 정치꾼들에게 떠밀려 대전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엔 충남 풍기의 인삼 건강식품 공장에서 주부·학생들에게 견학을 시켜주고 물건을 파는 '홍보 대사' 일을 하기도 했다.
■'기중기'와 '외인부대'
그러던 지난해 11월, 그에게 감독직 제의가 들어왔다. "신생팀이 생겼는데 선수들만으로는 홍보가 안 되니까 그래도 이름이라도 알려진 저한테 요청이 왔던 것이죠."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는 이 감독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즉각 선수 영입에 나섰지만 왕성하게 활동하는 실업팀 선수들을 영입할 능력도 돈도 신생팀에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속팀이 해체됐거나 실업팀 입단이 안 돼 '노는' 선수들을 끌어모아 '외인부대'를 만들었다.
이번 추석대회에 나서는 에너라이프 선수 7명 중 공백기가 없었던 경우는 한 명도 없다. 백두급(무제한)의 정민혁(35)은 2004년 신창 씨름팀이 해체되면서 보험설계사로 일했다. 한라급(105㎏ 이하) 최성남(32)은 2004년 LG 씨름단 해체 이후 꽃집을 운영했다. 다른 5명도 모두 부상을 당했거나 초등학교 지도자 등을 하면서 3개월~5년간 운동을 못했던 선수들이다.
이 감독은 "그래도 8강 정도는 자신 있다"고 말했다. 에너라이프 선수들은 지난 3월 처음 소집된 이후 매일같이 새벽 체력훈련 2시간, 오전 웨이트 3시간, 오후 기술훈련 3시간 등 강훈련을 소화했다. 이 감독은 선수들에게 "어려웠던 시절 생각하면서 눈 딱 감고 운동만 하면 연봉이 절로 올라간다"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이 감독은 자신에게도 똑같은 최면을 걸고 있다. 이런 최면이 통했는지 소속팀의 채희관(29·한라급)·정민혁 등은 공백기를 극복하고 용인(4월)·문경(8월) 지역대회에서 각각 2위·3위에 올랐다.
"단순해지고 느려진 요즘 씨름이 보기 안타깝다"는 원조 '인간 기중기'. 그가 이끄는 외인부대가 추석 모래판에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