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는 19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어디든 느닷없이 다가가 삽시간에 온 마을을 휩쓸어 버렸다. 높은 전염률과 치사율에 비해 예방과 치료방법이 없어서 인류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콜레라가 처음 침입했을 때는 괴질(怪疾)이라 불렀다. 그러다 차차 '쥣통'이라 했다. 또한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준다는 뜻으로 호열자(虎列刺)라 불렀다.

'호열자는 본래 한국에서 쥣통(痛)이라 칭하던 괴질이니, 이 병에 걸리면 완연히 쥐 같은 물건이 사지(四肢)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 같으며, 운신도 임의로 못하고 뼈만 남아 죽는 고로 쥣통이라 하였다. 이 병이 한 집에 들어가면 한 집의 사람이 거의 다 죽고,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칡덩굴같이 뻗어 가며 일거에 일어난 불과 같이 퍼져간다.'(대한매일신보 1909.9.24. 논설 '감회를 기록함')

정치적으로 암울하기만 하던 1909년 7월 말 부산과 청주에서 처음 콜레라 환자가 나타난다. 이어 8월 중순 인천·신의주로 번지고, 9월 초순에는 서울까지 올라온다. 통감부 외사과 직원, 친위대 군인, 광무학교 학생, 창덕궁 인부, 일본인 순사, 일본인 관광객 등 너나 할 것 없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해 9월 26일까지 전국에서 872명의 환자가 발생해 503명이 숨졌다.

일본 순사와 헌병들은 호구조사를 하는 모습〈큰 사진·1920년 콜레라 창궐 시 호구조사모습〉,대한제국 정부와 의학교가 보급한 '호열자예방주의서'〈작은 사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관청 업무시간은 단축되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각종 토목공사도 중단되었고 시장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콜레라를 피해 고향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기차역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 매국노들의 처신이 빈축을 샀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거액을 들여 새 집을 매입했는데 괴질이 무서워 이사를 미루었고,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10.1)

'내부대신 박제순은 괴질을 피하기 위해 손님을 받지 않았는데, 일본인인 경우는 즉시 만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10.5)

불행 중 다행으로 10월 들어 환자는 크게 줄었고, 12월경 콜레라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관공서와 학교, 시장도 제 모습을 되찾았다. 1910년 1월 집계 결과, 1909년 7~12월 콜레라 감염자는 1514명, 그중 사망자는 1262명이었다. 이 피해는 1886·1895년 두 차례 괴질로 수만명이 숨진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 통감부의 강압적 방역이 한몫을 했다. 일본 순사와 헌병들은 호구조사, 환자격리, 통행차단 조치를 취하고 이를 어기면 구류와 벌금형에 처했다.

희생자가 적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한국인의 높아진 위생의식이다. 대한제국 정부와 의학교는 '호열자예방주의서'를 보급하는 등 보건위생사업을 펼쳤고 개화 지식인들과 김익남, 유병필, 김필순 등 의사들도 국민계몽에 팔을 걷어붙였다. '호열자' 극복의 숨은 공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