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없는 도시라더니, 과연 뉴욕답다. 낯선 타국 땅에서 처음 명절을 보내는 소녀그룹 원더걸스 멤버들에게 "송편도 못 먹겠네요. 어떻게 해요?"라며 안쓰러운 마음을 전했더니, 우렁찬 '반전(反轉)'이 귓전을 때린다. "저희 벌써 송편 빚을 준비 하고 있어요. 누가 더 예쁜 딸을 낳을지 겨뤄봐야죠. 하하하." "인근 방앗간을 통해 송편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할 수 있다"며 "추석에 우리끼리 신나는 파티를 벌일 것"이라고 깔깔대는 소녀들의 명랑한 목소리에서는 그늘을 찾기 힘들었다. 추석을 며칠 앞두고 국제전화를 통해 원더걸스를 만났다. 미국의 톱스타 그룹 조나스 브러더스(Jonas Brothers) 공연의 오프닝 쇼를 맡아 45개 도시를 도는 전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요즘 뉴욕 맨해튼 JYP USA 사무실에서 데뷔 앨범을 녹음하고 있다. 스피커폰을 통해 2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들은 참새떼처럼 쉴 새 없이 재잘댔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가족이 그리워도 당찬 생기를 잃지 않는 미국 속 원더걸스. 왼쪽부터 선예, 유빈, 예은, 선미, 소희.

"송편은 물론이고, 호박전, 산적, 동그랑땡, 불고기, 궁중 떡볶이 등을 다 만들 거예요. 아차, 고구마전도 빼놓을 수 없죠. 계속 녹음하느라고 강행군을 할 텐데 그날만큼은 영양 보충도 좀 하고 긴장도 풀려고요. 유빈 언니가 잘 만드는 브라우니도 추석상에 함께 올릴 거예요. 맛 보신 적 없으시죠? 기가 막혀요. 우리 음식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예은)

"아, 난 곶감도 먹고 싶은데…. 어디 구할 데 없을까?"(유빈), "그건 정말 못 구할 것 같아. 한국 식품 파는 데서도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곶감 많이 먹으면 변비 걸려. 명절 때마다 엄마가 저한테 곶감은 5개 이상 먹지 말라고 하셨다니까요."(선미)

이들의 타국살이는 벌써 넉달째. 그나마 최근에는 뉴욕에서 정착 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난달 말까지는 정처 없는 '유목민' 신세였다. 한순간도 발 뻗고 쉴 수 없는 빡빡한 일상이 이어졌다. "한 곳에서 먹고 자니까 아무래도 안정된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하다"는 이들은 "그래도 설날에는 잠깐이라도 한국에 들어가서 세뱃돈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세뱃돈을 받는 게 맞는 거죠?"(선예), "그런데 꼭 내년 설날을 한국에서 보내야 하나? 우리가 미국에 휴가 온 것도 아닌데 더 열심히 해서 설날 즈음에 여기서 정신 없이 활동하고 있으면 가족들이 더 좋아할 것 같지 않아?"(유빈)

스타가 되고 나서는 한국에서도 휴일이 드물었다는 이들. 하지만 3년 전 연습생 시절만 해도 추석을 전후한 긴 연휴를 '풀 타임'으로 즐길 수 있는 처지였다. 선예는 "낯선 뉴욕에서 추석을 보내려니 가슴이 아픈 건 사실"이라며 "가족들이 함께 모여 차례 지내고 아침밥을 먹는 그 익숙한 풍경이 많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제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할머니가 빚어 주시던 송편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는데…. 지금도 늘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선미는 "데뷔하고 난 뒤, 너무 바빠서 포항에 있는 집에 통 못 들러보다가 작년 추석 때 오랜만에 내려가보니 집도 이사를 하고 제 새로운 방도 아주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며 "집안 일을 열심히 도우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가로막으며 '서울에서 고생하는 딸 손에 절대 물 묻히게 할 수 없다'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찡하다"고 했다. "어른들 화투판에 끼어서 고스톱 쳤던 생각도 나네요. 전 규칙은 잘 모르는데 그림만 맞춰서 쳤던 거죠. 어른들이 옆에서 '피(껍데기)'를 많이 먹어야 된다고 어찌나 열심히 조언해주시던지."

발야구도 수준급일까? 전미 투어 도중 조나스 브라더스 멤버들 및 공연 스태프들과 발야구를 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은 원더걸스 멤버들.
춤과 노래도 좋지만 영어가 기본. 미국 뉴욕 JYP USA 사무실에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선미. 멤버들은 “소희와 선미의 영어 공부가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유빈은 부모님이 미국에 계셔서 한국에서 홀로 추석을 보냈던 경우다. "연습생 시절에는 명절이 되면 거의 저 혼자 숙소에 있었어요. 물론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음식도 갖다 주고 했지만 TV를 벗 삼아 심심하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죠. 연습실에서 혼자 춤도 많이 췄습니다. 노래방 기계를 갖다 놓고 목청껏 소리도 질렀죠. 추석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데 찾을 수가 없어 '까치 까치 추석은 어저께고요'라며 가사를 바꿔 노래도 했다니까요." 작년 추석에는 모처럼 부모님도 서울에 계시는데 라식 수술을 해서 하루 종일 집에 누워있었다는 그는 "그때 눈물 젖은 송편의 맛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엄마 아빠, 지금은 오히려 저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어요. 걱정 마시고 멋진 한가위 되세요."

소희는 '양심고백'을 했다. "실은 작년 추석 때 스케줄이 없었는데 피곤하다는 핑계로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다"며 "이후 할머니 할아버지를 통 뵙지를 못했는데 요즘 두 분의 몸이 편찮으시다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무겁다. 당장 날아가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건강하셔야 돼요. 제 얼굴 오래오래 보셔야죠."

이들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이유는 미국 음악시장에서 두 발로 우뚝 서고 싶다는 꿈이 있기 때문. 조나스 브러더스와 함께한 전미 투어 이후 이들의 막연한 소망은 실체를 갖춘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아시아계가 아닌 미국의 다양한 인종들 앞에서 45회 공연을 마쳤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인 일이죠. 저희가 이번 투어에서 만난 분들이 100만명쯤 된다고 하던데, 그분들에게 우리 이름을 알린 것만으로도 큰 수확입니다. 이토록 저희를 몰라주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인데, 꿋꿋하게 이겨냈잖아요? 이제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 있게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예은)

선예는 "우리에게는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는데 기대 이상의 무대를 미국 사람들 앞에서 펼쳐 보였던 것 같다"며 "게다가 한국에서 보냈던 2년 반의 가수 생활을 한 발짝 떨어져서 차분하게 되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두고 싶다"고 했다.

두달여간의 투어 동안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묻자 이들은 토론토 공연을 첫손 꼽았다. "야구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5만 7000여명 관객이 꽉 차 있었어요. 무대에서 그렇게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을 마주한 건 처음이었죠. 게다가 막바지 콘서트라 그런지 대부분의 관객들이 저희 '노바디' 춤을 일제히 따라하시는데 정말 울컥했어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어 더 행복한 소녀들. 토론토 공연을 앞두고 몰래 숙소를 빠져 나온 원더걸스 멤버들이 시내를 구경하고 있다.
뉴욕의 숙녀가 된 원더걸스. 전미 투어 오프닝 쇼를 맡았던 록 밴드 어너 소사이어티의 새 앨범 발매 파티장을 찾아가고 있다. 유빈과 예은이 앞장섰다.

이들의 미국 데뷔 앨범은 11월 발매 예정. 조나스 브러더스와 함께 부르는 노래도 있고, 국내 히트곡도 영어로 다시 불러 싣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는 이들은 "미국에 우리 연령대의 걸 그룹이 드문 데다 색다른 메이크업과 의상을 앞세워 이미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뒀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들이 미국 원정을 떠난 사이, 한국에서는 수많은 걸 그룹들이 정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 "국내 상황을 보면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느냐?"고 하자, "흐뭇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여유를 부린다.

"사실 우리는 지금 팬 입장에서 다른 걸 그룹들의 춤과 노래를 감상하고 있어요. 원더걸스 초기 멤버였던 현아양의 포미닛이 아주 잘 하고 있고, 소녀시대, 브라운 아이드 걸스, 신인그룹 에프 엑스도 훌륭해요. 저희가 국내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경쟁심이 발동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어쨌든 다양한 걸 그룹들이 나와 제각각 특색 있는 노래를 들려주고 있는 현실은 가요계에 큰 힘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소희)

최근 한국 비하 발언 논란으로 아이돌 그룹 2PM을 떠나 고향인 미국 시애틀로 돌아간 재범은 이들과 함께 한 소속사에서 연습생 시절을 보낸 동료. 뉴욕에서 인터넷으로 이 소식을 접하며 걱정이 많았다는 이들은 "에브리싱 윌 비 오케이(Everything will be O.K)"를 외쳤다.

"누구나 힘든 시기는 있는 거니까 본인이 너무 낙심만 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행복한 시간이 찾아올 거예요. 재범이 오빠가 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용기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게다가 이번 사건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잖아요.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면 앞으로 더욱 잘 될 거라고 믿어요."(선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