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국립의대(醫大)에 한국 유학생 몰린다

입력 2009.09.22 03:04

의대 1년학비가 1만달러 '미국의 20%' 수준…
의사면허 따면 EU 어디서나 개업
4개 국립의대에 80여명 한국학생 전용 기숙사도
입학 자체는 쉽다해도 진급시험 등 까다로워

데브레첸=오윤희 특파원
헝가리의 국립 데브레첸의대 생명과학동 건물 대형 강의실은 100여명의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지난 10일 오전 10시 노벨상 후보로 이름이 오른 적도 있는 팔 게르게이(Gergely) 교수의 의료화학 강의를 듣기 위해 온 학생들이다. 이 대학은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동쪽으로 220㎞가량 떨어진 대학 도시 데브레첸(Debrecen)에 있다.

독일·스페인·영국 등 전 세계 각국 학생들이 뒤섞인 강의실에 한국인 학생들도 10여명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교단 전자 스크린 쪽을 바라보는 이 학생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老)교수가 진행하는 영어 강의에 완전히 몰입한 듯한 모습이었다.

현재 이곳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의대생은 49명. 이 학교 국제교육센터 영어 프로그램 운영자 아띨라 예나이(Jenei) 교수는 "2004년까지만 해도 한국인 학생이 한명밖에 없었지만, 최근 몇년간 해마다 한국인 입학생이 10~15명씩 늘었다"며 "재학생 전원이 우수하다. 우리는 한국 학생들이라면 언제든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곳엔 외국인 학생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 학생 전용 기숙사가 있다. 다음달엔 기숙사에 한국 식당까지 문을 열 예정이다.

헝가리에 있는 4개 국립 의대 가운데 나머지 3개인 부다페스트·세게드·페치의대에도 한국인 학생이 각각 10~30명 정도 돼 헝가리 전체의 한국인 의대생은 80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우리에게 멀리만 느껴졌던 헝가리 의대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헝가리 동부의 데브레첸 의대 강의실.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보인다./데브레첸=오윤희 특파원
◆헝가리 의대에 몰리는 한국 학생

데브레첸의대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의 배경은 다양하다. 영국·미국에서 의대를 다니다 흉부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흉부외과 부문의 명성이 자자한 이곳으로 온 학생들도 있고, 외국에서 장기 거주한 탓에 한국 입시제도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도 있다. 또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의술을 펼쳐 보겠다는 당찬 꿈을 가진 학생들도 이곳에서 미래를 준비한다.

이들이 미국이나 서유럽이 아닌 헝가리 의대를 택한 이유는 뭘까. 의대 홍보를 맡고 있는 포흐라이터 마르기트(Margit)씨는 "높은 교육 수준과 저렴한 학비"라고 말했다.

1년 학비만 5만~6만달러(약 6100만~7300만원)에 달하는 미국 의대에 비해 헝가리 의대 1년 학비는 1만달러(약 1200만원) 수준. 반면 의학이 발달한 독일에서도 상대적으로 싼 의료비 때문에 헝가리로 의료 관광을 올 만큼 헝가리 의료 수준은 높다. 헝가리에 있는 대다수 의대가 헝가리어와 영어 수업 코스를 병행하고 있다는 점, 헝가리에서 의사 면허를 따면 유럽연합 국가 어디에서나 개업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2학년 김소정(19)씨는 한국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데브레첸의대에 진학했다. 김씨는 "남들이 '한국에서 의대를 못 가니까 굳이 헝가리까지 갔구나!'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때 제일 속 상해요. 한국에서 의대를 졸업해도 한국에서만 의사를 할 수 있잖아요.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 주인공처럼 멋진 흉부외과 의사가 돼 원하는 곳 어디든지 가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꿈을 이루기 위해 견뎌내야 하는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4학년 함창수(22)씨가 이곳에서 보낸 4년간은 방학을 제외하곤 하루하루가 공부, 시험 준비의 연속이었다. 대략 오전 8~10시에 시작하는 첫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1~2시간씩 예습을 하고, 1학기 38학점 정도 되는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 하루 7~8시간씩 수업을 듣는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대략 오후 5~6시.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함께 공부를 하거나 자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2~3시가 되기 일쑤다. 평균 수면시간은 한가할 때가 4시간 정도.

한 학기당 약 15회, 1주일마다 한번꼴로 있는 시험 전날엔 밤을 새운다. 시험 전날 밤을 새우는 건 함씨뿐 아니라 여기 한국 학생들의 불문율이다.

지난 학기 5.0만점에 5.0을 받은 2학년생 구영진(22)씨는 아버지가 "한국은 의사가 너무 많아서 의대를 졸업해도 예전만큼 미래가 밝지 않다"며 유학을 권유해 데브레첸에 입학했다. 구씨 역시 "시험기간엔 7~8㎏씩 살이 빠지는 아이들도 있을 정도로 힘들다"고 말했다.

◆'의대 우회 진입'만 노리면 실패

그러나 밝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의대 진학에 실패한 후 학비가 싸고 영어로 수업을 하는 헝가리 의대에 '우회 진입'하려는 학생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외국인 학생들이 의대에 입학하려면 화학·생물·물리·영어·인터뷰 등 시험을 치러야 한다. 시험은 한국에서 의대를 준비할 때만큼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입학 자체는 국내 의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입학한 이후엔 1학기에 36~38학점 이상을 들어야 하는 꽉 짜인 시간표, 매주 치르는 테스트, 까다로운 진급 시험, 언어적 장벽이 만만치 않은 부담이다.

두 아들을 데브레첸의대에 보낸 후 헝가리 의대 진학 상담을 하고 있는 함승훈(53·거창국제학교 이사장)씨는 "그저 '의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절대 이곳 의대에 적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세계를 무대로 꿈을 펼칠 각오가 돼 있는 사람만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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