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에 중독된 한국-4] 대한민국 국회의 중심은 ‘로텐더홀’?

입력 2009.09.21 17:10 | 수정 2009.10.08 01:48

시니어패스(senior pass)로 어반테라스(urban terrace) 갈 수 있나요?’ 서울시의 외국어 남용을 꼬집는 질문이지만, 사실 ‘외국어 중독’은 서울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S라인’, ‘리필’ 등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도 외국어가 남용되지만 깨닫지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닷컴은 연속 기획으로 한국 사회 전반의 외국어 중독 상태를 진단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본다. / 편집자 주

외국어에 중독된 한국 <4> 대한민국 국회의 중심은 ‘로텐더홀’?

지난 7월 미국 의회 인턴프로그램으로 한국에 온 미국 대학생들과 만났던 신모(22)씨는 지금도 ‘로텐더홀(rotunda hall)홀’이란 단어를 들으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함께 찾은 미국 학생이 “한국 국회에도 미국처럼 로턴더가 있다는데 보고 싶다”며 “거기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곳 맞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신씨의 당황한 표정에 그 학생은 “미국 국회의사당(the Capitol)과 같은 이름이라 궁금했을 뿐”이라며 말머리를 돌렸다. “로텐더홀이라고 뉴스에서 듣기는 했는데 미국에도 있는 줄은 몰랐다”는 신씨는 “국회의원들 하는 짓도 창피한데, 의사당 이름까지 미국을 따라 한 것 같아 정말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한국의 외국어 중독은 주요 공공기관과 장소의 명칭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기관은 물론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문화 시설에서도 우리말 이름은 사라지고 있다.

지난 15일 해외 언론에게 ‘세계 5대 제멋대로인 의회’의 하나로 꼽힌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본청 중앙홀의 명칭은 ‘로턴더홀’이다. 보통 ‘로텐더홀’로 불리는 이곳은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앞 광장을 가리킨다. 지난 1월 점거 농성을 벌이던 민주당 의원들이 해산에 나선 국회 방호원들과 난투극을 벌였고, 지난 6월에도 여야 의원과 보좌진 수백 명이 뒤엉켰던 곳이다.

‘로턴더’는 둥근 천장이 있는 원형 홀(hall)이나 원형 건물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이다. 유럽 중세시대 중부 유럽에서 널리 유행했는데,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도서관 등이 이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에서도 이 ‘로턴더’를 찾아볼 수 있다.

한글 관련 학자들은 우리 입법부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의 중심부 명칭이 정체불명의 외국어라는데 문제를 제기해왔다. 이 ‘로턴더홀’에서 제헌절 기념식이 열리고, 한국 의회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신익희 전 국회의장의 동상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천장은 둥글지만 바닥은 사각형이어서 제대로 된 ‘로턴더’ 양식도 아닐 뿐더러 ‘로턴더’ 자체에 ‘홀’이라는 의미가 있어 ‘로턴더홀’은 중복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관한 국회 측의 움직임은 없다. 한 한글 전문가는 “국회사무처 관계자에게 ‘미국 의회의 로턴더홀을 따와 1976년의 국회의사당 건립일지에도 ’로턴더홀‘이라고 되어 있다. 국회사무처에서는 ’중앙홀‘로 고쳐 부르고 있으나 통상적으로 ’로텐다홀‘로 불리는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회 공식 홈페이지(www.assembly.go.kr)의 국회의사당 자료에는 이곳이 ‘로턴더홀’이라고 소개돼 있다.

서울 한복판 세종로에 위치한 세종문회회관의 간판 공연장도 ‘세종체임버홀’과 ‘세종M시어터’이다. 전기합선으로 불이 난 기존의 시민회관 자리에 신축해 1978년 개관한 세종문화회관은 당시 세계 최대의 대극장(4200석)으로 주목받을 만큼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지난 2006년 국제회의장을 개조해 만든 476석 규모의 실내악 전용연주장에는 ‘세종체임버홀’, 2008년 소극장을 바꿔 탄생한 639석의 크기의 중극장에는 ‘세종M시어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각각 실내악을 뜻하는 ‘체임버(chamber)’와 중간 크기, 극장을 뜻하는 ‘medium’과 ‘theater’에서 따와 병기한 것이다. 서울 토박이라는 윤모(60)씨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세종’을 딴 곳에 굳이 외국어 명칭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소극장도 새로 만든다는데 거기는 또 어느 나라 말을 쓸 지 걱정”이라고 했다.

한편 세종문화회관 밖에서는 아예 세종대왕과 외국어 명칭이 공존이 불가피해졌다. 오는 10월 9일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광장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설치되고, 그 지하에는 세종대왕의 기념 전시관인 ‘세종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동상 바로 뒷편은 2800㎡ 넓이의 ‘플라워카펫(flower carpet)’이고, 지하 전시관의 한쪽 출구는 ‘올레(alleh) KT’의 사옥이다.

이러한 서울시의 ‘외국어 사랑’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글 운동가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시의 외국어 오남용을 지적해왔다. 그러나 지난 9일에도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한강 주변에 문화지대를 조성한다며 반포대교 북단에는 `반포 컬쳐 랜드(Culture Land)‘, 금호나들목 주변에는 `금호나들목 빌리지 커뮤니티 플라자(Village Community Plaza)’, 한남대교 상류에는 `윈드 앤 바이시클 플라자(Wind & Bicycle Plaza)‘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서초구는 지난 5일부터 6일까지 서울 반포로 지상에 길이 80m의 ’그린아트(green art)보도교‘를 설치했다. 배포한 보도자료에서는 ’서울의 새로운 볼거리 랜드마크(landmark) 제공‘, ’녹색 보행 네트워크(network) 확장‘ 등의 효과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 서초구청은 지난 7월 ‘공공시설 우리말 바로잡기 사업’을 3개월 동안 벌인다고 홍보해왔고, 아직도 사업 기간은 한 달 이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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