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 하키선수 6명이 아제르바이잔으로 집단 귀화해 국가대표로 뛰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일보 8월 27일자 보도
지난달 24일 유럽여자하키선수권이 열린 네덜란드 암스텔펜 스타디움이 술렁였다. 장내(場內)에 괴상한 이름이 울려퍼진 것이다. '미경 알리예바(Mi Kyung Alieva), 보경 알리자다(BoKyung Alizada), 선영 루스타모바(Rustamova), 희정 압바소바(Abbasova)….'
국내에서 아제르바이잔으로 귀화(歸化)했다고 전해진 한국 선수 5명의 새 이름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대표 유니폼을 입고 나온 이들은 펄펄 날았다. 그 덕에 하키 불모지(不毛地) 아제르바이잔은 강호 러시아와 1대1로 비겼다.
결론부터 말해 2004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한 전(前) 국가대표 신미경 등 한국 선수들은 귀화한 게 아니고 이중국적을 취득한 것이며, 인원도 6명이 아니라 5명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들은 왜 아제르바이잔까지 갔을까.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부근에 있다. 이 나라는 한마디로 석유와 가스가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 자원부국(富國)이다. 1848년 상업 유전 개발이 성공하자 영국과 러시아가 일명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아제르바이잔은 지난해 세계 금융위기 때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작년 중반까지 유지된 고(高) 유가에 힘입어 작년 경제 성장률이 10.8%나 됐다. 최근 3년 동안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무려 29.3%다.
아제르바이잔의 유일한 약점은 북한과 맞먹는 독재국가라는 점이다. 알리예프 부자(父子)가 정권을 세습한 것도 북한과 똑같다. 이런 오명을 탈피하는 방법으로 아제르바이잔이 택한 것은 스포츠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오일달러로 해외 우수선수를 들여오면서 국적까지 부여했다. 이 나라가 전략종목으로 채택한 것은 축구, 하키, 역도, 레슬링이었다. 축구는 다른 옛 소련 연방국가, 레슬링은 중동, 하키와 역도 선수 수입은 한국이 대상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당국 관리는 "우리는 IT전문 인력 양성에 열정을 쏟는 대신 전문인력을 사버리는 게 훨씬 빠르다고 생각한다"며 "스포츠 선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돈 많은 나라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다.
여자 하키선수들의 아제르바이잔 진출은 2007년 이 나라 하키협회가 대한하키협회에 선수 지원을 요청하면서 물꼬를 텄다. 신미경이 그해 이 나라 재벌 소유인 '아타홀딩' 소속으로 유럽 클럽대회에 나섰고 국가대표가 됐다.
올해 초 아제르바이잔은 신미경 외에 추가로 4명의 선수와 시즌 계약을 맺었다. 신미경은 "연 단위가 아닌 대회기간 동안 출전하는 단기계약을 맺은 것"이라며 "모두 선수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어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제르바이잔 국가대표로 나선 것은 이 나라 하키협회의 요청이었고 국적 문제나 선수 등록 절차는 협회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국적을 바꾼 귀화가 절대 아니다"고 했다.
신미경은 "선수들이 최근 한국 언론들의 '집단 귀화' 보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며 속상해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국가지만 우리 선수들에게만 특별히 이중국적을 인정해주고 있으며 히잡 착용도 강요하지 않는다.
아제르바이잔에 간 선수들은 한국보다 나은 환경과 지도 방식에 만족하고 있다. 우리 실업팀은 월급 150만원 정도에 무작정 운동만 시키는데 이곳에서는 훈련이 체계적인 데다 숙소도 제공된다. 월급도 2500달러로 국내보다 2배 수준이다. 선수들은 "'오일달러에 팔려갔다'고 비난하지만 우리는 운동에 대한 열정과 경험 때문에 왔다"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은 하키 수준도 낮아 국내 30대들에게도 부담이 없다. 올 초 전재홍 감독을 국가대표 감독으로 영입했다.
국내 한 하키관계자는 "우리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은 말 안 해도 다 아는 것 아니냐"며 "운동을 하고 싶어도 팀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외진출을 귀화 운운하며 비판할 수 있느냐. 오히려 국위선양이다"고 말했다.
하키선수들이 아제르바이잔 대표선수로 발탁된 예처럼 국제스포츠계의 '국적 스와핑'은 역사가 깊다. 옛 소련 붕괴로 정상급 선수들이 카타르, 바레인으로 수입되면서 시작된 선수들의 국적 바꾸기는 작년 올림픽 때는 수십명에 이르렀다. 아제르바이잔 인접국 그루지야 배구대표팀에는 브라질 선수 2명이 뛰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탁구선수 당예서(28)와 석하정(24)이 중국에서 귀화해 우리 대표팀으로 나섰고 우리 양궁선수 김하늘과 엄혜랑은 호주와 일본 국적으로 각각 출전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국적을 바꾼 선수들에게 3년 동안 국제대회 출전 금지 규정을 적용한다. 하지만 선수의 원(原) 국적 국가가 출전을 허용하거나 해당 연맹이 허락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