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 [4] '파란 눈의 항일투사' 헐버트

조선일보
  • 허동현 경희대학교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입력 2009.09.02 23:10 | 수정 2009.09.16 09:33

    1909. 8. 29~1910. 8. 29




    옛날 버드나무꽃(楊花)이 흐드러졌다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는 구한말 이후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143명이 묻혀 있다. 언덕 위 B묘역을 가면 '대한제국 지킴이'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 박사를 만날 수 있다. 그의 묘지 기념석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미국 버몬트주 출신의 헐버트가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886년이다. 고종이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세운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영어교사 자격이었다. 그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교육자로, 언론인으로, 역사가로, 외교자문관으로 평생을 한국에 바쳤다.

    한국 부임 초기 그는 학생들이 세계에 무지한 것을 보고 세계지리 교재인 '사민필지(士民必知)'와 '초학지지(初學地誌)'를 펴냈다. 이 중 '사민필지'는 학생과 지식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일시 귀국했다가 선교사로 다시 온 1893년부터는 영문월간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와 '독립신문' 영어판, '한국평론(The Korea Review)' 등을 펴내 조선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조선왕조사를 기록한 '대동기년'과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는 그에게 역사가의 명성도 안겨주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그는 언더우드 등과 함께 매일 밤 고종 곁을 지켰다.

    1942년 서재필·이승만 등이 연 워싱턴 '한인자유대'〈왼쪽 헐버트, 오른쪽 이승만 대회위원장〉
    그의 이름이 우리 기억에 더욱 깊이 아로새겨진 것은 을사늑약 이후 보여준 항일외교 때문이다. 1905년 고종의 특사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다 실패한 그는 2년 뒤 네덜란드 헤이그로 향했다. 이준 열사가 "일본인들이 우리를 짓밟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을 때, 헐버트는 고종의 친서를 품고 유럽을 돌며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호소했다. 1907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강연에서 한 그의 다짐은 발림 말이 아니었다.

    "나는 한국에 있은 지 수십년에 물정을 자세히 알고 일인의 학정을 눈으로 보았으니, 힘을 다하여 미국 각처에 공론을 일으키려 이곳저곳 다니는 중이오."

    1909년 9월 초 일본의 감시를 뚫고 한국에 왔을 때 그는 부인 메이(May)에게 쓴 편지에서 "일본인들은 도서와 글쓰기를 전부 장악했고, 한국어를 없애려 하고 있다오"라며 '언어'마저 잃어가는 한국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일본의 '추방령'으로 종전 때까지 한국에 오지 못하자 미국에서 한인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42년 서재필·이승만 등이 연 워싱턴 '한인자유대회'〈왼쪽 헐버트, 오른쪽 이승만 대회위원장〉에도 참석해 힘을 보탰다.

    1949년 7월 29일 86세의 노구로 그리던 이 땅을 다시 밟은 그는, 일주일 만에 영원한 잠에 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소망대로 양화진에 묻혔다. 햇살이 따가웠던 지난 1일 그의 작은 묘지 앞에 참배객들의 발길은 오래 머물렀다.


    [특집]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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