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전 매국노 이완용의 영욕

입력 2009.08.29 14:10 | 수정 2009.08.29 15:05

이완용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34년 11개월간의 혹독한 식민 통치가 시작됐다. 정확히 99년 전 바로 오늘이다.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과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한일병합 뒤에는 ‘매국의 상징’ 이완용이 있었다. 척사파,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을 거듭한 ‘한국 근대사의 카멜레온’ 이완용의 알려지지 않은 행적들을 되돌아봤다.

◆독립협회장을 지낸 당대 최고의 명필가

변신의 귀재 이완용. 과거급제 후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배운 그는 1887년 7월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통역으로 미국에 건너가 국제정세에 눈을 뜨고 친미파가 됐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 당시에는 친러파 내각의 핵심에 섰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1905)한 직후부터는 친일의 선봉에 서서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을 연거푸 성사시킨다.

1907년 2월, 그는 조카이자 훗날 자신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를 편집한 김명수(金明秀)에게 “천도(天道)에는 춘하추동이 있고 인사(人事)에는 동서남북이 있으니,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해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했다.

이완용이 항상 외세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때 독립협회장을 지내고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은 “이완용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면서 그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극찬하고 있다. 독립문 건립에도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그는 현재까지도 독립문 현판 글씨의 작성자라는 소문의 중심에 있을 정도로 명망 있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애국은 잠시뿐이었다.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며 많은 이권을 외국에 넘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연유로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후, 한 동안 정세를 살피다가 본격적인 친일행보에 들어선다.

◆며느리와의 부적절한 관계 소문까지

이완용에 대해 세간의 악평이 난무한 것은 당연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가 죽은 장남의 처 임건구(任乾九)와 사통(私通)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한일병합 때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자결한 학자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역사서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을사늑약 후 이완용의 아들 승구(升九)가 일본 유학 중 귀국해 집에 왔더니 아버지가 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으니 내가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탄식하며 자결했고, 이후 이완용이 며느리를 아예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풍문이 적혀있다.

당시 언론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이재명 의사의 칼에 맞고 대한의원에 입원해있던 1910년 1월 5일, 대한매일신보는 ‘총리대신 며느리 임 부인은 병든 시아버지를 간호하고자 의원까지 들어가서 약시중(侍湯)에 힘쓴다지. 평시에는 ‘색양(色養)’하여 그 즐거움을 다하더니 병에 걸리자 저렇게 걱정하다니 그 효성은 천만고의 특색일세’라고 비꼬았다.

이러한 ‘근친 스캔들’은 오랜 기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완용이 사망하자 월간지 ‘개벽’ 1926년 3월호에는 “지하에 있는 이재명 의사는 웃겠지만 팔자 궂은 과부 며느리는 유달리 슬퍼할 것”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대해 학계는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장남 승구의 사인은 자살이 아니라 병사”, “사망시점은 한일병합은 물론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전인 1905년 8월”, “당시 사료들의 감정적 서술 경향” 등이 그 근거다. 그러나 “민중들의 증오와 응징의 감정이 표출된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가문의 쇠락(衰落)

이완용은 매국의 대가로 ‘경성 최고의 현금 부호’가 됐다. 1925년 당시 파악된 현금 자산만 300만원(현재 가치로 약 600억 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부귀영화 이면에는 조선 민중의 세찬 응징이 기다리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사건(1907) 직후 이완용은 고종에게 양위(讓位)를 종용했고, 결국 그 해 7월 20일 순종의 즉위식이 열렸다. 그 시각 성난 군중들은 중림동 그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가재도구, 고문서, 우봉 이씨 조상들의 신주(神主)까지 전소됐다. 훗날 그는 조상 신주가 불에 탄 일을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총리대신이었음에도 고종이 집을 하사할 때까지 반년 동안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관저와 형 이윤용 집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거리를 지날 때마다 청소년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대한매일신보 1908년 12월 18일자). 종종 개에 비유되기도 했고 민영찬의 중국인 첩으로부터 침 세례를 받기도 했다(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4일자). 그의 조카는 양주 선영에 갔다가 의병들에게 인질로 잡힌 적도 있다(황성신문 1909년 10월 1일자).

결국 1909년 12월 22일 그는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다 군밤장수로 변장한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려 왼쪽 폐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1926년 사망할 때까지 해수병(기침병), 폐렴 등 폐질환을 앓았다.

사망 후 그의 묘는 상습적으로 훼손됐다. 익산경찰서에서 순사를 배치해 지킬 정도로 훼손이 거듭됐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완용은 죽어서도 일본 순사의 보호를 받는다”며 비웃었다. 해방 후에는 소풍 나온 초등학생들에게도 짓밟히는 수모를 겪다다 1979년 증손자 이석형에 의해 화장돼 인근 냇가에 뿌려졌다.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던 그의 집안도 공중분해 됐다. 세간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한 손자 이병주는 1962년 일본으로 밀행해 귀화했고,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직계후손은 뿔뿔이 흩어져 사실상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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