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에서 황영기 국민은행(KB) 지주회사 회장의 징계를 둘러싼 논쟁이 비등하다. 그는 우리은행 경영을 맡았을 때 파생금융상품에 잘못 투자, 1조6200억원이라는 손실을 안겼다. 이 지경이면 최고 경영인으로서 누가 묻지 않아도 알아서 행동으로 깔끔하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억울하다'거나 '왜 나만 겨냥하는가'라는 황 회장의 항변과 불만에 동조하는 의견도 있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황 회장이 펼치는 방어 논리 중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실은 있다. 위험 상품에 투자했던 그 시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고 했지만, 같은 시기에 투자를 권유받고서도 상품 구성이 불투명하고 사기성이 짙다는 판단에서 아예 투자하지 않은 금융회사가 더 많았다.
정부는 다음 달 징계 절차에 들어간다고 벼른다. 대통령의 선거 참모였다는 직함을 너무 팔고 다닌다는 괘씸죄까지 걸어 중징계하든, 아니면 대통령 측근이었던 점을 배려해 가볍게 징계하든 감독기관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이번 논쟁의 핵심은 황 회장 이하 우리은행 경영진 몇명의 징계가 아니다. 우리는 경영진의 징계를 넘어 치사율이 무척 높은 한국 금융계의 암세포를 봐야 한다. 정부가 경영권을 장악한 은행은 왜 쉽게 부실화하는가. 왜 국민 세금으로 경영 실패를 막아주는 일이 정부계(系) 은행에서는 반복되는가. 이것이 진짜 가치 있는 논쟁거리다.
외환위기 전까지 옛 재무부 관료들이 배타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던 조흥·상업·한일·제일·서울신탁은행의 간판은 깨끗이 사라졌다. 이 중 제일은행만이 지난 11년 사이 주인이 두 번 바뀌고 SC라는 '알파벳 명함'을 가진 덕분에 이름만 겨우 건졌다. SC제일은행은 이번 금융위기에서 구제금융 한푼 받지 않았다. 모기업인 스탠다드 차타드가 인도 등지에서 소액 금융 영업으로 좋은 실적을 내온 경험이 있고, 국내에서도 저축은행을 인수하는 식으로 한방의 큰 홈런보다는 단타(短打)를 모아 착실하게 점수를 쌓는 영업을 해왔다.
관료들의 영향력 권역에서 멀리 있는 외환은행도 구제금융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서 벗어나는 요즘에는 실적마저 좋아졌다. 은행 재매각을 앞두고 슬슬 값이 치솟고 있다.
반면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은행은 잊을 만하면 염치없이 국민 세금을 벌컥벌컥 삼켜온 머신(기계)과 같다. 우리금융지주회사·우리은행에는 98년 3조3000억원, 2001년 4조6000억원, 올 3월 말 1조3000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됐다. 황 회장이 경영권을 쥐었던 우리금융 지주회사 슬하의 경남·광주은행까지 합하면 1조5030억원의 구제금융을 받고서야 겨우 되살아났다.
1조5030억원을 국민 1인당 세금 부담액(올해 467만원 안팎)으로 나누면 얼추 경기도 광명이나 경남 진주 시민의 숫자가 나온다. 광명·진주 시민들이 1년 내내 땀 흘려 낸 세금으로 우리금융그룹의 용감무쌍했던 투자 실패를 메워준 꼴이다.
정부계 은행과 외국계 은행 사이에는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가. 격차의 출발점은 경영진 인사다.
우리은행에는 정부가 경영진을 외부에서 영입해 내리꽂거나, 아니면 경제 관료 출신이 금빛 낙하산을 타고 내려갔다. 그중에는 이전 직장에서 거액 손실을 냈던 전과(前科)를 무시한 채 국제금융통으로 허위 포장된 인물이 있었고, 그저 금융 행정을 잠시 해봤다는 이력만으로 최고경영진 자리를 차지한 사례도 있었다. 거액 투자 때 꼭 취해야 할 보완 조치(리스크 관리)의 ABC마저 모르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결산 장부에 혼자 힘으로는 막지 못할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한 후에야 서로 네 탓 경쟁하는 꼴을 보라. 우리은행의 전임 경영진과 후임들이 권력층 핵심 인물까지 동원해 벌이는 책임 떠넘기기 싸움은 음모와 협잡, 저격으로 가득 찬 스릴러 소설 1권을 탄생시킬 만큼 가관이다.
황 회장이 겁 없이 투자를 감행했을 때 금융 감독 책임을 맡았던 사람이나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가 뜨거운 물에서 발가락을 빼는 기교는 감탄사가 절로 솟을 정도로 치밀하면서 조직적이다. 그 당시에 경제부총리가 파생상품 투자를 공개 권고했던 보도자료조차 뭉개고 있다. 우리은행 경영진, 금융감독원 원장, 경제부총리 모두 경영 과목에서는 낙제점이었지만, 책임회피 과목에서는 천재성을 발휘하고 있다. 납세자를 향해서는 사과나 반성의 말 한마디 없다.
엄청난 세금을 삼키고도 아무 죄의식 없는 얼굴들을 보노라면 초등학교 교사가 어린 학생들에게 국민의 기본의무 중 하나로 납세(納稅)를 꼽기가 쑥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