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 출신 元 기황후 세도의 배후였지만…

조선일보
  • 이한우 출판팀장
    입력 2009.08.29 09:25 | 수정 2009.08.29 16:29

    元황태자 낳자 고려왕실 맞먹어
    공민왕, 연회 열어 기씨세력 제거
    元군사로 고려 정벌하려다 대패

    고려 말 한 여인이 공녀(貢女)로 뽑혀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후궁을 거쳐 마침내 1339년(충숙왕 복위8)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우리가 흔히 기황후(奇皇后)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기황후는 황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는다. 고려가 여전히 원나라의 사위국가였음을 감안할 때 고려에 남아 있던 기황후의 가족들이 어떤 권세를 누렸을 것인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기황후의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지방수령을 지낸 인물로 전서(典書·판서)를 지낸 이행검의 딸과 결혼해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 기륜(奇輪) 다섯 아들을 두었고 막내딸이 바로 기황후다. 아들 이름에 하나같이 차(車)변이 포함돼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 중 첫째 기식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기철이 사실상의 장남이었다.

    기황후가 황태자까지 생산하자 기씨 집안은 하루아침에 고려 왕실에 버금가는 지위로 뛰어오른다. 이미 세상을 떠난 기자오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했고 한림학사를 보내 묘비를 지어주었다. 당연히 기자오의 부인은 영안왕 대부인(大夫人) 작위를 받았고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임명됐다. 더불어 기철은 덕성부원군, 동생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다. 충혜왕 때의 일이다.

    이후 기철 4형제는 황후의 세를 믿고 갖은 횡포를 일삼았으며 그의 친인척들도 경쟁적으로 악행을 일삼았다고 '고려사'는 적고 있다. 충혜·충목·충정 그 어느 임금도 기씨 집안 사람들의 횡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쩔쩔매야 했다.

    그러나 공민왕은 달랐다. 마음속 깊숙이 탈원(脫元)구상을 갖고 있던 공민왕은 고려 안의 친원세력 제거야말로 탈원하는 첫 걸음으로 여겼다. 즉위 초 공민왕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일종의 총독부격인 정동행성으로 행차를 했다. 이때 기철이 은근슬쩍 공민왕과 말을 나란히 세워 이야기를 걸려고 했다. 자신이 고려국왕과 대등한 인물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선대 국왕들과 달랐다. 일단 공민왕은 호위군사들로 하여금 기철의 접근을 차단하도록 명했다. 사실 기철의 힘은 원나라가 고려에 미치는 파워와 비례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공민왕 때가 되면 명나라가 기세 좋게 일어서고 원나라는 북쪽으로 쫓겨나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었다. 원나라의 쇠락은 곧 기철 세력의 쇠락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20년 이상 권세를 누려온 기철이 순순히 물러설 리가 없었다. 기철은 원나라 황태자에게 딸을 바친 권겸, 노척 등과 손을 잡는다. 고려 정계 안에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구체적 움직임은 여기까지다. 과연 기철이 공민왕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는 역모를 꿈꿨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오히려 공민왕의 반원자주(反元自主)노선이었다. 공민왕 5년(1356) 4월 왕은 대신들을 위한 대규모 연회를 연다. 여기에 가능한 많은 기씨와 권겸, 노척 집안 사람들을 초대했다. 가장 먼저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기철과 권겸이었다. 공민왕의 명에 따라 두 사람이 먼저 철퇴의 희생물이 됐다. 곧바로 집에 머물던 노척도 제거됐다.

    기철 권겸 노척 모두 '고려사'에는 반역자로 기록됐지만 애매한 점이 있다. 반역을 도모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라면 공민왕의 등장으로 인해 바뀌고 있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닐까? 물론 그들이 원나라와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국기(國基)를 흔들고 백성들의 전토를 빼앗아 큰 고통을 안긴 부분은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반역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기철 세력 제거를 계기로 공민왕은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다. 때로는 광기를 보이고 때로는 천재성을 보였던 공민왕이 적어도 이때만은 개혁군주로서 빛나는 면모를 보였다. 자기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한 기황후는 극도로 분노했다. 공민왕 13년(1364) 원나라 황제는 기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고 했다.

    그러나 고려도 예전의 고려가 아니었다. 자신의 명이 먹혀들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한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쳐들어왔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대에 대패한다. 그것은 고려에서 기씨 집안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벗어나기 시작한 기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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