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상주 시골 소년, 호주에서 신천지를 열다

입력 2009.08.22 03:44 | 수정 2009.08.22 09:39

태즈메이니아섬 '토지王' 김문배

지난 9일 마운틴 웰링턴(해발 1270m) 정상에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이 산은 호주 태즈메이니아(Tasmania)섬의 주도(州都) 호바트를 감싸고 있다. 서울이 섭씨 34도에 육박하는 폭염(暴炎)에 휩싸인 날이었다.

태즈메이니아는 호주 6개 주 가운데 하나다. 모양이나 위치가 딱 우리 제주도다. 면적은 6만8401㎢로 남한의 3분의 2인데 인구는 49만명이다. 20만명이 사는 호바트를 제외하면 대개 무인지경의 광활한 초지(草地)다.

그날 호바트 시내는 운무(雲霧)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2004년 4월3일 바로 그 자리에서 김문배(金文培·51) ㈜MBKIM닷컴 대표는 가능성을 봤다. 인간의 눈은 능력에 따라 시야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5년 4개월이 지나 그는 태즈메이니아 토지왕(王)이 됐다. 포도농장 9만4500평, 초지 47만5000평을 갖고 있다. 도심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금싸라기 땅은 계획대로라면 3년 뒤 한인 타운과 랭귀지 스쿨로 바뀐다.

통일벼가 가져다준 꿈

김문배는 경북 상주군 화동면 어산리에서 농부 아버지의 3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그의 키만한 나무지게를 내놓았다. 그에겐 '가난'의 화인(火印)이 박혀 있었다.

이진한 기자 magmum91@chosun.com 시골 소년이 마침내 대륙을 호령하게 됐다. 구글 화면을 손으로 잡는 것 같은 사진을 찍느라 기자는 1시간40분 동안 진땀을 흘렸다. 호주 오른쪽 아랫부분의 섬이 바로 태즈메이니아다.
그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 건 고(故)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보급한 '통일벼'였다. "수확이 늘면서 집안 사정이 확 펴졌어요. 제가 대학 갈 생각을 하게 된 게 통일벼 때문이었습니다."

김문배는 광주 대건신학교에 진학했다. 육사(陸士)진학을 바라던 부모는 실망했다. 그가 신학(神學)에 빠진 것은 고 1때 만난 상주 서문동 성당의 프랑스인 한 안토니오 신부 때문이었다. 그가 가르친 자유와 평등에 매료된 것이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80년 5월17일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휴교령이 내려지자 학교는 그에게 고향 부근에서 봉사활동을 할 것을 명했다. 문경 가은성당에서 그의 운명은 다시 방향을 틀었다.

"제가 너무도 변해 있었어요. 순수했던 마음이 사라진 걸 알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신부가 된들 역할을 제대로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지도 신부님께 장문(長文)의 편지를 보냈지요."

두 달 뒤 면담에서 주교 신부는 말했다.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 김문배는 울며 말리는 동료 신학생들을 뒤로 한 채 거리로 나섰다.

변신

성균관대 교육학과에 입학하던 1982년까지 그는 그릇장사, 포장마차를 했다. 희한하게도 그는 손대는 사업마다 돈을 벌었다. 대입 학력고사 다음 날부터 포장마차를 끌고나갔다. 석 달 만에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했다.

대학을 한 학기 다닌 뒤 그는 입대했다. 방위 생활은 원인 모를 알레르기로 6개월 만에 끝났다. 그 뒤 그의 삶에는 기이한 인연이 잇따른다.

―83년에 복학했지요.

"제 직업이 그때 결정됐어요. 서울 길음동에서 입주과외를 하다 1983년 우연히 동부이촌동의 주산학원을 떠맡게 됐어요. 강의실 5평에 원생이 12명이었어요."

―돈이 어디서 났습니까.

"누나에게 빌린 돈으로 학원을 인수한 뒤 석유 곤로 하나 끼고 숙식을 했습니다. 주산을 하나도 할 줄 몰랐는데 독학으로 한 달 만에 1급 자격을 땄어요. 원생이 3개월 만에 80명으로 늘었습니다."

―수완이 대단합니다.

"주산뿐 아니라 친구가 돼준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었죠. 같이 운동도 했고요. 학원 오는 아이들 20~30%는 놀러 오잖아요. 골목대장이 된 거죠."

―결혼도 그때 했지요.

"1984년 11월 15일입니다. 같은 과 여학생이 갑자기 '형, 나이도 있는데 장가가야 되는 거 아냐'라고 해요. 그날 저녁에 집사람(김정희·48)을 만났어요. 같은 고향 성당에 다녔는데 저보다 두 살 어려요. 당시 아내는 회사원이었어요."

―그 뒤로 계속 학원이 커졌지요.

"주산학원을 아내에게 맡기고 저는 발산동에서 유치원을 인수했어요. 얼마 뒤에는 유치원 안에 속셈학원도 차렸고요. 그게 '예성 영재원' '성균속셈학원' '형설어학원'으로 계속 커졌습니다. 입시학원이 된 겁니다. 교실 30개에 학생 수가 1000명이나 됐어요."

―그 뒤 다른 사업을 하다 여러 번 망했지요.

"1997년 IMF가 왔잖아요. 레스토랑을 인수했다가 1년 만에 1억원을 날리고 김밥나라라는 체인점을 만들었다가 손해를 봤어요. 지금 김밥 체인점이 인기잖아요? 제가 사업 아이템은 잘 잡아요. 시대를 너무 앞서가서 탈이지만요."

신천지(新天地)

그에게 2000년 1월 7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주산학원장 시절 같은 아파트에서 친하게 지내다 호주로 떠난 지인(知人)이었다. 뉴질랜드를 거쳐 호주에 정착한 그는 "너무 좋으니 빨리 오라"라고 채근했다.

그는 같은 달 13일 아내를 '척후병'으로 호주에 보냈다. 1주일 뒤 돌아온 아내는 '살 만하냐'는 김문배의 질문에 '살 만하다'고 했다. '자신 있냐'고 묻자 '자신 있다'고 했다. 가족은 2월 1일 호주로 떠났다.

―무슨 결정을 그리 뚝딱 내립니까.

"저는 숙고(熟考)는 하지만 장고(長考)는 안 해요. 그래서 실패하기도 했지만요. 구두닦이만 안 해보고 이것저것 해본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요."

―호주에 가서 뭘 했습니까.

"유학생 하숙을 치면서 어학연수 일을 했습니다. 2000년 6월에 학원원장 29명이 답사왔는데 7월 22일에 120명이 연수왔습니다. 그런 인원이 한꺼번에 호주에 온 것은 처음이었어요."

―호주에 간 지 6개월 만에 가능한 일입니까.

"숙소 구하고 어학연수할 학교 섭외도 문제였지만 짐도 대단했습니다. 김치만 250㎏이 들어왔어요. 학교가 분산돼 있어서 점심 먹이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어요. 궁리 끝에 버우드파크라는 공원에 모이게 해 배식(配食)했지요. 120명이 밥 먹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살려줘! MB!"

2002년 그의 운명을 바꿀 일이 태즈메이니아주에서 일어났다. 호주 연방정부는 인구가 정체된 태즈메이니아를 멜버른이 있는 빅토리아주에 통합하려 했다. 놀란 태즈메이니아 주정부는 '이민'에서 활로를 찾기로 했다.

당시 태즈메이니아 주 고문변호사였던 이안 던컨이 김문배에게 연락했다. "이민 에이전트를 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의를 받은 그는 2003년 4월3일 호바트시 마운틴 웰링턴에 올랐다. 순간 그의 가슴 속에서 '어!'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제2의 고향이랄까, 가슴에 뭔가 와닿는 겁니다. 첫사랑 같은 느낌이랄까, 여기서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저곳 답사다니던 그는 지금 보유하고 있는 토지에 주목했다.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미개발지로, 평당 가격이 5000원~1만원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 돈과 국내 투자자를 유치해 차곡차곡 땅을 사들였다.

―'파란빌 프로젝트'가 만들어진 게 그 직후지요.

"한국 은퇴자 타운과 영어학교, 기숙사, 쇼핑센터를 짓는 겁니다. 웬만한 신도시급이 될 겁니다."

―그사이 땅값이 많이 올랐다면서요.

"10배 이상 뛰었지요.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는 없지요."

―호주 투자는 대개 영주권과 관계되는데, 집을 사면 영주권이 그냥 나오나요?

"호주는 영주권 제도가 복잡해요. 부동산을 산다고 무조건 영주권을 받는 건 아닙니다."

―언제쯤 착공됩니까.

"내년 상반기로 예상합니다. 24일에 현지 언론과 시의회의원들을 불러 발표회를 예정하고 있습니다."

―호주는 백호주의(白濠主義)아닌가요? 백인만 우대하는.

"태즈메이니아는 외국인이 없으면 주로 존립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적극적입니다."

―결국 분양의 문제인데 안 팔리면요.

"여기 와보니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