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인(47)씨의 서울 상수동 작업실에 찾아가던 날에도 도심 곳곳엔 강씨가 손으로 쓴 충무로영화제 깃발들이 펄럭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캘리그라퍼(calligrapher·글씨예술가)인 강씨는 24일 개막할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의 새 로고를 썼다. 한국의 대표적 영화제를 꿈꾸는 충무로영화제의 얼굴이 그의 손에 의해 바뀐 셈이다.
"'충무로' 세 글자를 한 300번쯤 쓴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원하는 글씨가 나오지 않았는데, 어느 날 밤 집에서 이 글씨가 나왔어요. '아, 이거다' 했지요." 강씨는 "'충'은 위로 뻗고 '무'는 아래로 내려가며 '로'는 새처럼 날아가는 형상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작품 의뢰를 받으면 내용에 대한 이해를 먼저 시도한다는 강씨는 "충무로는 누구나 다 아는 영화의 중심지여서 글에 의미를 담고 쓰기가 더욱 어려웠다"고 했다. 결국 그는 '충무'와 '로'를 따로 떼어 생각했고, 충무로→중구→서울→한국→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운을 글로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보다 글씨가 훨씬 낯익은 작가다. 소주 '참이슬' 상표도 그의 글씨이고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타이틀도 그가 썼다. 그의 작업실 한쪽 선반에 보니 그의 글씨로 상표를 만들어 붙인 된장·고추장부터 라면·과자·음료수까지, 편의점 하나를 족히 채울 상품들이 그득했다. 영화와 책 제목 글씨도 그가 의뢰받는 단골 종목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예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글 서예는 한자처럼 다양하지 않고 매여 있더라고요. 한글도 추사 김정희처럼 고민하고 쓰면 멋진 글이 나오지 않을까,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중2 때 '영원히 먹과 함께 산다'는 뜻으로 '영묵(永墨)'이란 호를 지었다. 2002년부터 작품을 쓰기 시작한 그는 2006년부터 아예 전업작가로 나섰다. 충무로영화제는 붓으로 썼지만 그의 필기도구는 나뭇가지, 갈대, 수세미, 칫솔, 솔방울, 나무젓가락, 동아줄, 빗자루까지 "글씨 성격에 따라 무한히 확장돼" 왔다. '참이슬' 상표 글씨를 의뢰받았을 때 그의 감회는 남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안이 너무 어려워서 졸업여행도 못 갔습니다. 그때 진로주조 초청으로 서울에 3박4일 여행을 왔었거든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반갑더군요."
올 10월 미국 뉴욕에서 초청 전시회가 예정돼 있고, 내년엔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그는 "'충'자와 '무'자의 힘이 '로'자의 날개에 실려 쭉쭉 뻗어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