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168]

조선일보
    입력 2009.08.18 03:30

    제14장 海蔘威(해삼위) 가는 길

    "도마, 내게 다짐해주시오. 앞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천주께서 기뻐하지 않을 정치적 소요를 일으켜 교회와 교우들을 곤란한 처지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코 도마에게 성사(聖事)를 베풀어 줄 수 없소."

    그런 백 신부의 말에는 조국 불란서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주입받은 제국주의적 현실 인식과 어우러진 바티칸의 타협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한국 지배에 대해 일본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고, 그들의 식민통치 아래서 가톨릭을 지켜내려는 안간힘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자 안중근은 예전 대학을 설립하는 문제로 뮈텔 주교와 다투고 마음속으로 뇌었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천주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 신부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이 나라의 독립이나 겨레의 자유를 되찾는 일에 대해서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도움받으려 하지 않겠다.'

    그때 안중근은 그런 다짐과 함께 빌렘 신부에게서 불어를 배우던 것까지 그만두어버렸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이 조용히 웃으며 받았다.

    "천주 기독의 진리를 전하는 신부님의 말씀은 믿지만, 내 나라 내 겨레의 운명보다는 교회의 생존을 우선시키는 그와 같은 무리한 요청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기실 저는 북간도에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유능한 독립군 장교를 육성할 수 있는 군관학교를 설립하고자 떠나는 길입니다. 애초부터 성사를 통한 축복과 격려를 기대했던 것이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진리로부터 떠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러스트 김지혁
    그리고는 목례와 함께 백 신부가 거처하는 사제관을 나왔다. 며칠 뒤 안중근은 다시 배를 구해 타고 성진을 거쳐 청진으로 갔다. 그토록 간절하게 성사 받기를 원했던 성모승천 대참례일(성모승천 축일·8월 15일) 다음날이었다.

    청진에 이르러서야 마침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는 크지 않은 화물선 한 척을 찾을 수 있었다. 돈을 내면 그 화물칸 한모퉁이에 여객도 실어주는 러시아 배로, 안중근에게는 바로 찾고 있던 배였다. 안중근은 그 배로 해삼위로 가서 경계가 허술한 연추(煙秋) 쪽에서 북간도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배가 막 떠날 무렵 속도 빠른 발동선 한 대가 청진 해관(海關) 쪽에서 물살을 가르고 달려와 중근이 탄 배를 가로막았다.

    "오이, 서라. 해사(海事) 경찰 임검이다. 대한제국 밖으로 나가는 인원과 화물을 확인해야 하니 선장은 발동을 끄고 뱃전으로 나오라."

    그러면서 배에 오른 일본인 임검 경관은 기어이 안중근을 배에서 끌어내렸다.

    "너는 빙표도 없고 사증도 없이 노서아(러시아)로 숨어들려 했다. 밀항의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어서 배에서 내려라. 꼭 노서아로 가겠으면 요건부터 갖춰 배에 올라라."

    그 바람에 안중근은 하는 수 없이 그렇게도 피해보려 했던 뭍길로 북간도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한 달, 참으로 외롭고 고단한 길이었다. 안중근은 8월 염천을 걸어 함경도를 가로지른 뒤 회령(會寧)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일본군 수비대의 눈을 피해 종성(鍾城)으로 간 뒤 그곳 상삼봉(上三峰)을 끼고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이 마침내 간도 화룡현(和龍縣) 지방전(地坊典)에 이른 것은 그해 9월도 중순이 지난 뒤였다. 아버지 안태훈의 친구인 김 진사의 말을 듣고 처음 마음이 움직인 날로부터는 거의 반년 만이었다. 어쩌면 너무 오래 머뭇거리고 너무 멀리 길을 돈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안중근이 얻은 것도 많았다. 그동안 다동 김달하의 집에 머물면서, 그리고 안창호와 박은식, 신채호가 있는 대한매일신보를 드나들면서 그는 당시의 가장 치열하고 진보적인 의식으로 자신을 새롭게 가다듬었고,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 퇴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 같은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바로 그 현장에서 목도하고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간도에 이르기까지 험하고 힘든 여정도 그의 몸과 마음을 한 번 더 담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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