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의사(義士)'가 아니라 '장군(將軍)'으로 불러야 한다."
안중근은 공판과 최후진술 등에서 모두 4차례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參謀中將)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한 것이지 결코 개인으로서 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에게 적용되는 법은 일본의 국내법이 아니라 '만국공법(국제법)'이라고 주장했다. 1899년 제1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채택한 '육군 포로에 관한 법'은 의병도 교전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안중근도 만국공법에 따라 일본군 포로를 석방한 일이 있었다. 1908년 7월 국내진공 작전을 펼쳐 50여명 일본군 포로를 사로잡은 그는 "수용시설이 없는 포로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만국공법에 따라 이들을 풀어주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일본군의 역습을 받고 300명 부대원 중 20명만 살아남는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하얼빈 의거 후인 1909년 11월 안중근 배후에 독립의병 조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나 "안중근 개인에 의해 저질러진 행위로 처리하라"고 재판부에 지령했다. 한국이 국가적 차원의 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 법원은 "총 잘 쏘는 포수가 잘못된 애국심으로 저지른 단독 살인행위"로 판결했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대한의군이 국가적 차원이라는 근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고종 황제가 1907년 7월 강제 퇴위당할 때 '나라가 위급존망에 처했는데 공수방관(拱手傍觀)하는 것은 국민된 도리가 아니다'라는 조칙을 내렸는데 이것이 궐기를 지시하는 것으로 알고 의병항쟁에 나섰다"고 답했다.
입력 2009.08.17.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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