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입력 2009.08.15 09:23 | 수정 2009.08.15 15:56

독립운동가 춘산 이유필 선생의 아들 준영씨 인터뷰
"애국자인 당신 아버지를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운다면…"

춘산 이유필 선생의 젊었을 때 모습

“친일 논란이 불거졌을 때마다 어린 시절 상하이에서 매일 밤 대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들에게 국사를 가르쳐주셨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섭섭하고 불쾌했습니다. 조국독립에 한평생을 바친 댁의 아버지를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우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지난 11일 이준영 목사(80·은혜연합감리교회)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아 활동을 했던 아버지 춘산(春山) 이유필(李裕弼·1885~1945) 선생의 친일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 국제분쟁 피하기 위해 일제가 귀순 조작

1933년 3월 9일 이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의 관련자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됐다. 일본 정부가 중국 국적이었던 이 선생을 체포한 것은 국제관례상 국권침해였기 때문에 ‘이유필 본인이 자수했다’고 소문을 냈다. 이후 이 선생은 평안북도 경찰부로 이송되었고, 다음 달 전격 석방됐다. 임시정부 일각에서 “이유필이 석방된 이유는 그가 변절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 선생은 결국 제명됐다.

지난 11일 이준영 목사(80·은혜연합감리교회)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아 활동을 했던 아버지 춘산(春山) 이유필(李裕弼·1885~1945) 선생의 친일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석방된 후 가택연금을 당했고, 4개월 뒤에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3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럼에도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일제가 그토록 쫓아온 이유필이 3년밖에 살지 않은 데에는 모종의 타협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 역사학자가 일제 극비문서 입수해 오명 벗어

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이유필을 처벌하는 것보다 차라리 석방하여 이를 이용하면 도리어 한국통치상 유리하다’는 문구가 있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 선생의 친일 의혹은 해소됐다.

당시 이 문서를 찾아냈던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당시 임시정부 최고 거물이었던 도산 선생도 4년의 징역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3년형도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었다”면서 “더 이상 애국투사의 고귀한 광복투쟁 경력을 근거 없이 모독하는 행위는 역사가 용납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들 이 목사는 “지금도 대한민국에 야당, 여당이 있듯이 당시 임시정부에도 여러 계파(係派)가 있었고 정적(政敵)들의 음모도 있었죠. 친일 의혹이 사실이라면 해방 후 친일파에 대해 엄격했던 북한에서 평안북도 도위원장(현 도지사)에 만장일치로 선출될 수 있었겠습니까.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하기 위해 온 가족이 상하이로 건너간 가문은 우리와 도산 안창호 선생밖에 없었습니다”고 했다.

◆ 국민들이 내 아버지를 잘 모르는 이유

이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석오 이동녕,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등에 버금가는 신망높은 독립운동가였다. 이 선생은 후세 사람들에게 무명의 독립운동가였다.

이 선생은 상하이 교민사회에서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교민단 대표를 두 차례 역임했고, 임시정부 국무원, 대한노병회(大韓老兵會) 이사장, 인성학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칠 정도의 ‘거물’이었다. 1936년 3월 이 선생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언론에서 ‘상하이 독립운동의 거두의 출옥’이라는 제목로 대서필특할 정도였다.

이 목사는 “해방 이후에는 평양엔 조만식, 평북엔 이유필 선생이 있다고 유명세를 탔었다"며 ”1945년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남한으로 내려오던 중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어 남한에서 활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했다.

“친일은 나쁜 일이기 때문에 근거 없이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해결이 됐기에 망정이지만 우리 가족이 잃은 것이 참 많습니다. 내 나이 팔순이지만 이제는 잃어버린 시간을 뒤로하고 선친의 업적을 빛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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