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해 나간다
조국의 대지를 밟고
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 (중략)
반동파들을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깃발을 높이 휘날린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꽁무 작사, 정뤼청 작곡

작곡가 정뤼청. 중국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 ‘니에얼( 耳)’ ‘셴싱하이(       )’와 더불어 중국 현대 3대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인민작곡가. 1976년 베이징에서 사망.

중국 산시성 옌안시절의 정율성.

지난 7월 20일 중국 정부는 주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쌍백(雙百)’투표를 시작한다고 일제히 공표했다. 오는 10월 1일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여 ‘건국에 특별 공헌을 한 영웅적 모범인물 100인’과 ‘건국 이후 감동을 준 100인’ 등 모두 200명(쌍백명)을 선발하는 일종의 대국민 인기투표다.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하고 중국 3대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민작곡가 정뤼청의 이름도 당연히 ‘건국에 특별 공헌을 한 영웅적 모범인물’ 후보 150인 명단에 올라갔다. 각 항목당 경쟁률은 1.5 대 1. 투표는 오는 8월 10일까지 약 20일 동안 우편, 인터넷, 휴대폰을 통해 진행된다. 최종 투표결과는 8월 10일쯤 나올 예정으로 중국 언론과 네티즌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투표번호 108번을 부여 받은 중국의 인민작곡가 정뤼청이 한국인 정율성(鄭律成)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정 율 성
1914년 전남 광주(현 광주광역시) 출생
전남 화순 능주초등학교
광주 숭일초등학교
전주 신흥중학교
중국 난징 의열단 간부학교
중국 옌안 루쉰예술학원
북한 조선인민군협주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장
중국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국 중앙가무단·중앙악단 활동
1976년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
정율성과 그의 아내 딩쉐송(왼쪽)



1914년 광주서 태어나 1933년 중국으로
스파이 교육받고 난징·상하이서 첩보전


중국의 인민작곡가 정뤼청은 1914년 전라남도 광주(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다. 그가 본래부터 인민작곡가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음악가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에 가까웠다. 19살 되던 해인 1933년 셋째 형의 손을 잡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의 일가족 모두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점에서 그의 중국행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셋째 형 정의은도 의열단의 호남지역 모집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의열단은 중국 지린(吉林)성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무장독립단체로 일본군 및 관공서 테러와 요인암살을 주로 했다.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의 암묵적인 묵인하에 독립군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기도 했다. 의열단에 가입한 정율성 역시 난징에 있던 특수학교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고 난징과 상하이를 무대로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벌이던 식민지 조선의 열혈청년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정율성의 인생은 상하이에서 소련의 음악가 크리노와(Krenowa) 교수를 만나면서 180도 달라진다. 그의 숨겨진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대 출신의 크리노와 교수로부터 성악은 물론 작곡과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정부은(鄭富恩)이란 어릴 적 이름도 버리고 ‘선율(旋律)’로써 성공(成功)’하겠다는 의미에서 ‘율성(律成)’으로 개명까지 했다. 특히 1937년 옌안(延安)으로 옮기면서부터 그의 음악적 재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산시(陝西)성 옌안은 국공 내전 당시 중국 공산당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부패한 국민당에 실망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던 곳이었다. 그도 1939년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후 옌안의 루쉰예술학원 음악과에 적을 두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연안송’ ‘팔로군 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 등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곡들을 쓴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이후 옌안의 루쉰예술학원 성악학부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혁명가이자 음악가로 명성을 날리던 정율성은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작곡에 몰두하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그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옌안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중 아내 딩쉐송(丁雪松)도 만났다. 옌안의 여학생 간부를 맡고 있던 딩쉐송은 정율성과 사랑에 빠졌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1941년 국제결혼에 성공했다. 일설에는 “자존심이 강한 딩쉐송이 그를 먼저 찍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후 반평생을 정율성과 함께 한 딩쉐송 여사는 훗날 그의 자서전 ‘중국 최초 여대사, 딩쉐송’에서 “정율성은 몸이 약간 말랐지만 허리는 곧게 펴져있고 얼굴에는 영준하면서도 강인한 성격이 드러났다”고 했다. 정율성은 딩쉐송과의 사이에서 외동딸 정샤오티(鄭小提)를 뒀다. 음악에 인생을 건 사람답게 딸의 이름도 바이올린을 뜻하는 ‘샤오티친(小提琴)’에서 앞 두 글자를 따 ‘샤오티’라고 지었다. 현재 베이징에 살고 있는 정샤오티 여사는 중국 베이징 바로크 실내합창단 단장을 맡고 있다.

평양에서의 정율성


마오쩌둥도 정율성의 팬
건국 선포식 때 톈안먼에 울려 퍼져

정율성이 독립운동을 하다 음악가로 노선을 바꿀 때는 적지 않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간파한 크리노와 교수가 이탈리아 유학을 제의했을 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라는 신분과 ‘조국독립운동’이란 사명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가 뒷날 군가를 주로 작곡한 것도 독립운동과 음악활동 사이에서 접점을 찾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 그의 대표곡들은 박력 있고 경쾌한 리듬의 군가(軍歌)가 주를 이룬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팔로군 행진곡’은 작곡 직후부터 중국 각지의 전선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국민혁명 제8로군의 약칭인 ‘팔로군’은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로 오늘날 중국인민해방군의 모태다. 그의 ‘팔로군 행진곡’은 나중에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옌안에서 중국 공산당을 이끌던 마오쩌둥(毛澤東)도 그의 노래를 좋아해 자주 흥얼거렸다고 한다. 1949년 베이징 톈안먼에서 마오쩌둥이 신중국 건국을 선포하고 의장대를 사열할 때도 정율성이 작곡한 노래가 톈안먼 광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그의 말년은 불운했다. 1966년부터 10여년간 벌어진 문화대혁명은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의 친위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문화대혁명은 극좌노선을 바탕으로 기성문화를 배격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문화대혁명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에 제약을 받고 투옥되거나 심지어 맞아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정율성 역시 문화대혁명의 광풍(狂風)을 비껴가지 못하고 공연기회를 박탈당하고 작품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결국 그는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인 1976년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돌연 쓰러져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1988년 중국의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명령으로 그가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이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정식 지정되면서 복권됐다. 2년 뒤인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도 그의 노래가 경기장 가득히 울려 퍼졌다. 현재 그는 중국의 국립묘지 격인 베이징 시내 빠바오산(八寶山) 혁명묘역에 안장돼 있다.

하얼빈에 ‘평생사적관’ 개관 등 추모 열기
한국서도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 개최

그가 사망한 지 30여년이 넘게 흘렀지만 중국에서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여전하다. 지난 7월 25일에는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정율성 평생사적관’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새로 문을 연 사적관 내부에는 정율성이 살아 생전에 찍은 62장의 사진들을 비롯해 그가 생전에 사용한 피아노와 유품 200여점 등이 전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개관식에는 정율성의 외동딸 정샤오티도 참가해 “문화의 도시 하얼빈에서 나의 아버지 정율성 사적관을 열게 되어 기쁘다”며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지난 2002년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태양을 향해 달린다(원제 走向太陽·주향태양)’도 나왔다. 심지어 일부 중국인 음악광들은 그의 흔적을 찾아 그의 고향인 한국 광주를 방문하기도 한다. 광주광역시의 한 호텔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2년간 7000여명가량의 중국인 관광객이 정율성 생가 방문차 광주를 찾았다”고 전했다.     샤(關峽) 중국교향악단 단장은 정율성에 대해 “그는 중국·북한·한국 3개국 국민들의 공통된 심성을 반영한 음악가이고 또 동시에 3개국 국민들로부터 동시에 기념되는 인물”이라며 “이는 작곡가 중 거세무쌍(擧世無雙·세상을 통틀어 대적할 상대가 없다)한 것”이라고 했다.

정율성에 대한 열기는 그의 고향 광주를 중심으로 국내에서도 살아나고 있다. 광주에서는 지난 2005년 11월부터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를 시작했다. 당초 광주 남구청 주최로 열리던 음악제는 지난 2006년부터 규모를 키워 광주광역시 주최로 열리고 있다. 광주시의 한 관계자는 “오는 2010년 상하이 엑스포 한국관 내에는 ‘정율성 기념관’도 건립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가 다녔던 학교도 마찬가지다. 전남 화순의 능주초등학교는 지난해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교내에 그의 흉상을 세우기도 했다. 흉상 바로 아래에는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팔로군 행진곡’ ‘연안송’ 등 300여곡의 주옥 같은 선율을 남긴 작곡가요, 아시아에 희망을 선사한 혁명가인 선생의 뜨거운 조국애와 열정적인 예술혼을 기리며 그 호연지기의 기상을 후배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한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이 학교는 지난 2007년 9월 정율성의 유일한 혈육인 정샤오티 여사를 화순으로 초청해 기념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또 그가 다녔던 전북 전주의 신흥중학교도 지난해 3월 그의 외손자를 중국에서 초청해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광복 이후엔 북한서 활동, 군가 작곡 
"재조명은 해묵은 이념논쟁 촉발" 우려도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정율성에 대한 재조명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이념 논쟁을 촉발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도 표명한다. 그가 광복 이후 북한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이다. 1945년 광복 후 그는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협주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부장 등을 역임했다. 북한에서도 그는 작곡 실력을 발휘해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감행, 38선을 넘으며 부른 노래가 '조선인민군 행진곡'이다.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군도 그가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을 부르며 압록강을 건넜다. 지난 2000년과 2007년 1,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양을 찾아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할 때도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군 행진곡'이 평양 하늘에 울려 퍼졌다. 중국의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軍歌)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아마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율성은 6·25 전쟁이 터지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김일성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그를 중국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중국으로 귀국 후 그는 정식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한다. 그가 돌연 한반도를 떠나 중국 국적까지 취득한 이유는 아직 불명확하다. 다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유는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정율성의 아내 딩쉐송이 저우언라이에게 부탁해 그의 귀국을 김일성에게 요청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광복 후 남편 정율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딩쉐송은 평양 주재 신화사(통신사) 사장 등을 지내기도 했지만 언어문제와 문화 차이로 인해 북한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딩쉐송이 저우언라이의 수양 딸”이란 설(說)도 나온다. 실제 딩쉐송은 중국 여성 가운데 최초로 주 네덜란드와 덴마크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율성 광주 생가 논쟁

“남구 양림동이다” “동구 불로동이다”… 남구청 VS 동구청·종친회 법정다툼

현재 정율성의 고향 광주에서는 정율성의 생가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정율성이 태어난 생가는 전라남도 광주(현 광주광역시) 양림정(町)으로 돼 있다. 이에 따라 광주 남구청에서는 “정율성의 자필 이력서와 그의 아내 딩쉐송의 회고록을 근거로 따져도 남구 양림동 79번지가 정율성이 태어난 곳”이라고 주장한다. 남구청에서는 올해 1월 양림동 79번지 도로 이름을 ‘정율성로’로 바꾸고, 남광주 청년회의소 측에서는 정율성 선생의 흉상을 설치했다.

광주 동구 정율성의 생가터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

하지만 정율성의 문중인 하동 정씨 종친회 측과 광주 동구청에서는 정율성의 부친 정해업의 토지대장과 제적등본, 학적부 등을 근거로 “정율성의 생가는 광주시 남구 양림동이 아닌 광주시 동구 불로동 163번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주 동구 불로동 163번지에 위치한 히딩크관광호텔 측에서는 호텔 입구 주차장 터에 ‘음악가 정율성 선생 탄생지’라는 높이 4.5m가량의 비석을 세워둔 상태다. 하동 정씨 문중이기도 한 이 호텔 정찬구 사장은 “토지대장상에 1914년 동구 불로동 163번지를 선생의 부친 정해업씨가 소유했던 것으로 나온다”며 “남구청에서 주장하는 남구 양림동 79번지는 정율성의 형 정의은이 광복 1년 전인 1944년 구입해서 4년6개월간 살았던 곳으로 정율성 선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하동 정씨 문중의 주장에 대해 광주 남구청은 발끈하고 있다. 광주정율성음악제를 최초 기획한 남구청 측은 “정율성 선생이 중국에서 쓴 자필 기록에 따르면 전라남도 남구 양림정 출신이라고 나온다”며 “남구 양림동 출신이라는 것은 정 선생의 조카 박의란씨도 구술로 증언한 바 있다”고 말했다. 또 “남구 양림동 79번지는 1925년부터 정율성 선생의 외가쪽 친척들이 살았던 곳이라 정 선생이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율성이 태어난 1914년의 남구 양림동 79번지의 토지소유 여부에 대해서는 “선생의 일가가 들어오기 전에는 ‘추장격태랑(秋場格太郞)’이란 사람의 소유로 나오는데 이 사람이 정 선생과 어떤 관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광주광역시 문화예술과의 한 관계자는 “남구든 동구든 어차피 정율성의 생가는 광주에 있는 것 아니냐”며 “현재 생가 위치를 두고 관계자들 간에 법정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광주시에서 구체적인 입장을 결정한 것은 없고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반면 정율성의 고향 광주를 찾은 중국인들은 ‘2곳의 생가(生家)’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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