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는 다문화 어린이 도서관 '모두'는 매주 목요일 오전 초등학교 취학 전의 어린이 수십명이 깔깔대는 소리로 떠들썩하다. 한국 아빠와 외국 출신 엄마 사이에서 자라는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엄마 나라의 전통 놀이를 익히고 전래 동화를 듣는 '함께 떠나는 엄마 나라 동화 여행'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지난 4월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는 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몽골·이란에서 온 다문화가정 어머니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도서관은 지역 시민 단체인 푸른시민연대가 운영을 맡고 STX그룹이 후원하는 곳이다. 도서관 직원 김정연씨는 "엄마 나라의 문화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의 자긍심이 생기고 자기들끼리 연대감도 형성된다"고 했다.
다문화가정 문화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고 있다. 그 배경에는 '달라진 아빠'가 있다. 다문화가정 아버지들 사이에서 '무조건 한국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엷어지고, '엄마 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자'는 인식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99년 전북 진안군으로 시집 온 키르기스스탄 출신 아즈베코바 굴바르친(32)씨는 본업인 농사 외에도 여러 가지 '과외 활동'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굴바르친씨는 인터넷 카페 '키르기스스탄을 사랑하는 모임' 운영자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사업가·유학생·선교사 등에게 모국을 홍보한다. 회원들에게 키르기스어를 가르치느라 한 달에 서너 번씩 서울을 오간다. 여성신문 명예기자로 모국의 문화와 생활 풍습을 소개하는 대한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한다. 남편 김병열(41)씨가 굴바르친씨를 적극적으로 격려한다.
굴바르친씨는 "남편이 결혼 초기부터 '집안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라'고 했다"며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갈수록 지정학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아이들을 이 지역을 잘 아는 글로벌 인재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이를 위해 부부는 첫째 유진(9)양에게는 키르기스어를, 둘째 유미(7)양에게는 영어를, 막내 대현(5)군에게는 러시아어를 각각 '집중교육'할 계획이다. 세 가지 언어가 모두 유창한 엄마 굴바르친씨가 직접 가르칠 계획이다.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온 가족이 키르기스스탄과 러시아의 문화유산을 답사할 계획이다.
전남 목포에 사는 송영춘(35·체육시설 관리인)씨는 2007년 중국인 왕잉(23)씨와 결혼해 20개월 된 아들 명원군을 뒀다. 송씨는 10년 뒤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무술의 본산' 허난성 소림사 무술학교에 2년간 유학을 보낼 계획이다. 부부도 따라가서 아이와 함께 현지에 머물기로 했다.
송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다양하게 체험시키고 싶다"고 했다. "한자를 좔좔 읽고 중국어를 잘할 뿐 아니라 '나는 대륙의 피를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까지 심어주려고 해요. 혹시 주위에서 '혼혈'이라고 놀려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겠어요?"
전문가들은 "열린 마음을 가진 아빠들이 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다문화가정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하다는 점이 문제"라고 했다. 무지개 청소년센터 송연숙 다문화역량강화팀장은 "아버지가 어머니 나라 문화를 존중해서 적극적으로 아이에게 가르치는 집은 대부분 두 사람이 연애결혼 했거나 살림살이가 비교적 넉넉한 경우"라며 "부인을 존중하고 기를 살려주는 문화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사회가 도와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그런 노력은 하나 둘 성과를 내고 있다. 경북 구미시에서는 태국·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여성과 결혼한 남편들의 모임이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3년 구미시 다문화가족 지원센터에서 운영했던 '부부동반 템플 스테이'와 '부부 동반 요리 교실' 참가자들이 일회성 모임에 그치지 않고 남편 30여명이 참여하는 정기 모임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저녁식사를 겸해 만나 육아 정보도 나누고 '외국인 신부의 남편'으로 살아가면서 생기는 고민도 털어놓는다. 총무 이철수(40)씨는 "요즘 남편들은 아이들의 '핏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며 "비슷한 처지끼리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혼자서 고민할 때보다 아이들을 남다르게 잘 키우고 싶은 의욕이 솟는다"고 했다.
구미다문화가족지원센터 장흔성 센터장은 "남편들이 몇 차례 자발적으로 모이는 것을 보고 센터측이 나서서 '남편의 역할' '주기별 자녀교육' '이주문화의 이해' 같은 강좌를 마련해줬더니 모임이 정례화됐다"며 "남편들의 의지와 지역사회의 노력이 어울려 결실을 본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서구에도 남편들의 모임인 '다모회'가 지난 2006년 결성됐다. 대구 서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결혼이민자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임을 이어간 것이다.
2006년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 세 살배기 딸 예진이를 둔 임종찬(45)씨 부부는 딸에게 한글 그림책과 아내의 친구가 보내준 베트남 그림책을 함께 보여준다. 임씨는 "우리 아이가 잘 자라서 베트남 대사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다문화가정 출신 아닙니까? 정부와 지역 사회가 따뜻하게 바라봐주면 다문화가정에서 오바마 못지않은 인재가 나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