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09.08.13 23:01 | 수정 2009.08.14 04:31

본업보다 CF에 치중하는 배우들, 한국에만 있다?
CF 출연횟수가 영화 열 배까지… 실적 없어도 자주 보이면 '인기'
연기로만 수입 충분한 미(美)·일(日)선 인기보다 신뢰도로 모델 뽑아

영화는 찍을 때마다 흥행에 실패한다. 드라마는 1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다. 한데도 CF 모델로는 최고 대우를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심지어 '연예인조차 궁금해하는 연예인'으로 등극, 신비주의 이미지를 굳힌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CF 스타들의 출세 공식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선 아무리 잘 나가는 스타도 드라마보다 CF를 더 많이 찍는 경우는 드물다. 미국에선 명품 말고 상업CF에 스타가 나오는 경우도 드물다. 반면 우리나라는 CF 출연횟수가 드라마·영화 출연횟수의 열 배나 되는 연기자도 있다. 우리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무엇이 다른 걸까.

"실적 없이도 인기 유지하는 건 한국 배우뿐"

올해 9월, 4년 만에 드라마로 복귀하는 배우 김태희. 새 드라마는 그녀가 'CF 스타'라는 이미지를 벗을 수 있는 기회다. 오랫동안 그녀는 CF 스타로 각인돼왔기 때문이다. 김태희가 지난 2005년부터 찍은 CF의 수는 26회. 한 해 평균 5.2개다. 작년에만 싸이언, 옥수수 수염차 등 7개 업체의 광고를 찍었다. 같은 기간, 연기활동은 지난 4년간 영화 '중천'과 '싸움'뿐이었다. 장동건, 전지현, 한가인, 한예슬, 신민아 등도 광고활동에 훨씬 더 자주 얼굴을 비쳤다.

드라마나 영화보단 CF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스타들. 맨 왼쪽부터 전지현, 김태희, 한예슬.
'광고만 찍는 배우'가 가능한 것은 소위 '마케팅 파워' 때문이다. 지난 3월 마케팅 조사기관 '리스피아르'가 발표한 '2009년 상반기 한국 최고 인기 남녀 배우'를 살펴보면, 연기자 부문 1위는 장동건과 김태희다. 두 사람 모두 2007년 이후 작품 활동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나온 결과다. 두 사람의 최근 작품 흥행성적은 '영화 관객 40만명 동원 수준'이지만, 인기순위에선 1등을 한 것이다. 그럼 그 '인기'의 척도는 무엇이었을까.

'리스피아르'측은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선호도와 함께 '누가 가장 인기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대표성을 물었기 때문에 미디어에 가장 빈번하게 노출되는 연예인인 장동건과 김태희가 뽑힌 것 같다"고 설명한다. 광고에 많이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인기 스타'라고 인식한 시민들이 실제로 인기 배우로 뽑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인기도가 광고 출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거꾸로 광고 출연 자체가 인기도 측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국내에 일본인 모델을 소개하는 광고대행사 '블레스 월드'측은 이를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평했다. 정보현 차장은 "일본 역시 유행에 따라 인기 있는 스타를 CF모델로 선호하긴 하지만, 한 스타가 여러 CF를 장악하며 끊임없이 마케팅 파워를 굳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며 "모델이 얼마나 인기 있느냐보다는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신뢰도를 얻고 있는지를 더 중시하는 풍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브랜드 컨설팅 업체 '브랜드 38'(http://brand38.com) 박문기 소장도 비슷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운동선수나 가수들은 일반적으로 성적이 부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반면, 연기자들은 연기를 못하거나 흥행에 실패해도 칩거하고 광고에만 꾸준히 노출해주면 인기가 도리어 올라가는 경우가 자주 있다. 홍콩이나 일본에선 최고 CF 스타는 모두 영화나 드라마에서 최고 성적을 올린 사람이 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별다른 실적 없이도 스타로 군림하는 경우가 많다.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거품 심한 CF 개런티… 부익부 빈익빈"

톱스타에게만 CF 개런티가 수십억원씩 몰리는 것도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미국에선 TV 상업광고엔 대부분 전문 모델들이 출연하고, 연기자는 광고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연기력이 쇠퇴한 스타'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미국의 경우, 우리 사정과는 달리 연기만으로도 충분한 부(富)를 창출할 수 있고 초상권 등 부가 수익 구조도 탄탄하기에 가능한 얘기다. 일본 역시 기무라 다쿠야 같은 대 스타에게만 돈을 몰아주는 광고 풍토는 없다. 정보현 차장은 "일본에선 '어떤 스타냐'가 아니라, '제품을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막대한 개런티를 쓰지 않는다. 스타들도 돈을 많이 받고 여러 CF에 나오는 대신 한 CF에 오래 출연해 신뢰도를 쌓는 전략을 택한다"고 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스타 한 명의 독식 현상이 또 다른 특징. 요즘 CF 시장은 신민아와 한예슬이 양분하는 상황이다. 카피라이터 김원영씨는 "스타들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품활동보단 광고에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CF 스타들, 호감도만큼이나 비호감도 높아"

그렇다면 이런 스타 전략은 스타와 광고주에게 도움만 될까.

브랜드 38 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상반기 김태희의 광고모델 영향력은 1위였으나 2009년 상반기엔 5위로 추락했다. 전지현은 2008년 상반기 3위였으나 2009년 상반기엔 6위였다. 2008년 상반기 6위였던 조인성은 2009년 상반기 11위다.

같은 이미지가 반복해서 팔리면서 식상해지는 데다, 이들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라는 게 연구소측의 분석이다. 박 소장은 "매년 호감도와 비호감도를 함께 조사해 보면 CF에만 출연하는 인기 스타들의 비호감도가 점점 높아지는 추세를 보인다"며 "3년 전까지만 해도 신비한 이미지를 잘 구축한 스타가 CF 섭외 1순위였다면 최근엔 김연아f="http://focus.chosun.com/people/peopleView.jsp?id=555" name=focus_link>유재석처럼 꾸준히 실력으로 승부하는 스타들이 광고시장을 점유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CF 스타들도 장수하기 위해선 '인기'를 소모하는 것보단 '신뢰'를 쌓기 위한 투자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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