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아이만 늦었어요" 선행학습 부추기는 학원들의 '불안 마케팅'

조선일보
  • 최수현 기자
    입력 2009.08.05 03:17

    2년 앞서 배우는 건 기본 중학생이 수능문제 풀기도
    시작하는 연령 점점 낮아져 사교육 문제 주범으로

    4일 오후 서울 목동 H학원. 214호 강의실에서 '6영재4반' 학생 7명이 수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중2 수학 1학기 과정의 마지막 단원인 '일차함수'를 배우는 수업인데, 모여 앉은 아이들은 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다.

    강사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중1 과정에서 배운 'y=ax' 그래프가 그대로 자리만 옮겨서 'y=ax+b'가 된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또래들보다 2년을 앞서 배우는 셈인데도 안모(개봉초6)군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이미 한번 배웠던 거 복습하는 거라서요. 다른 학원에서 작년 12월에 중2 1학기까지 끝냈거든요."

    이 반 학부모 A씨는 "이 정도면 이 학원은 다른 학원에 비해 진도를 적당히 나가는 편"이라면서도 "우리 애가 학교에선 1등 하는데 교육청 영재교육원 시험만 보면 중3 과정까지 선행(先行)학습한 애들에 밀려 번번이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고 했다.

    방학을 맞아 '선행학습 사교육' 열기가 더욱 뜨겁다. 2000년경부터 특목고 인기가 높아지면서 선행학습이 사교육 시장의 핵으로 떠올랐고, 선행학습을 시작하는 연령도 점점 어려지는 추세다.

    현행 입시체제에서 선행학습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학원들이 이를 이용해 "남보다 앞서나가야 한다" "남들도 다 한다"는 식의 '불안 마케팅'을 펼치면서 결과적으로 선행학습이 사교육비 문제의 주범이 됐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과도한 선행학습 때문에 부작용을 겪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서울 목동의 한 학원에서 중학교 2학년 수학을 배우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 국제중과 과학고를 목표로 하는 이 학생들은 방학 중 일주일에 세 번 학원에 나와 하 루 7시간씩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선행학습을 한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학원들의 '불안 마케팅'

    중3 자녀를 외고에 보내려는 송모씨는 딸이 6세 때부터 영어학원과 과외를 시작했고,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수학과 국어 선행학습을 시켰다. 딸은 지난해 수학을 고3 과정까지 끝내고 현재 외고 대비 영어 듣기 평가에만 집중하고 있다.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사교육비가 월 100만원 이상 들었다고 한다.

    송씨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학원에 '선행학습을 1년 정도만 앞서가게 하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남들 다 2~3년씩 미리 하는데 혼자 천천히 가면 외고 못 보낸다'는 얘길 들었다"며 "안 하면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시켰다"고 했다.

    2~3년씩 미리 앞서가는 '과열 선행학습'이 원래부터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다. 한 특목고 입시학원 원장은 "이전까지는 과목별로 한두 단원 정도 미리 공부하는 것이 추세였지만, 특목고 인기가 높아진 2000년쯤부터 '특목고 입시를 통과하려면 2~3년치 선행학습이 필수'라는 인식이 퍼졌다"고 했다.

    실제로 외고는 3개 학년, 과학고는 2개 학년은 앞서가지 않으면 진학이 불가능할 만큼 입시 문제가 어렵다는 것이 학원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쉽게 출제된다 해도 경쟁이 워낙 치열하기 때문에 변별력 있는 한두 개 문제를 맞히려면 선행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너도나도 선행학습에 뛰어드는 '거품'과 '과열 경쟁'이 만들어진 데는 학원들의 상술(商術) 탓이 크다는 지적이다. 기자가 서울 대치동과 목동 학원들에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을 특목고에 보내고 싶다"고 상담을 하자, 이런 '살벌한' 답변이 돌아왔다.

    "초등학교 6학년이면 늦은 편이니 서둘러라. 요즘은 보통 초3부터 시작한다."(O수학학원)

    "최고 레벨은 중1도 수능 문제를 푼다. 학생 실력만 되면 진도는 얼마든지 나갈 수 있다."(A영어학원)

    "학년과 관계없이 중3 과정까지 끝내야만 과학고 대비반에 넣어준다. 초등학교 1학년도 우리 학원에 다닌다."(G수학학원)

    학원들이 "당신 아이만 늦었다"는 '불안 마케팅'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과도한 선행학습의 후유증

    지금 유행하는 선행학습의 목적은 '특목고에 진학해서 명문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과도한 선행학습으로 부작용을 겪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서울 관악구의 한 중학교 영어교사는 "특목고 준비하는 애들이 고교 문제집을 학교에 가져와서 푸는 것을 보고, 기초를 다져야 하는 중하위권 학생들조차 선행학습을 받으러 학원에 간다"고 했다.

    특목고 입시 T학원 원장은 "특목고에 합격하는 학생은 열 명 중 한 명꼴인데, 나머지 학생들은 일반고에 진학해 후유증을 겪게 된다"며 "특정 과목에만 치중하다 다른 과목 기초를 쌓지 못해 내신성적이 떨어지거나, 선행학습한 것만 믿고 고교에 가서 아예 공부를 하지 않거나, 앞선 학년 문제는 푸는데 자기 학년 문제는 못 푸는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오직 입시만을 위한 도구로 선행학습이 이뤄지다 보니 정작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의 학력은 과거보다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김경범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연구교수는 "학생들이 낮은 수준에서 선행·반복학습을 하다가 능력이 소진되고, 사고력과 창의력도 그 수준에 머물러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미국 대학에서 중도 탈락하는 한국인 학생이 가장 많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무리한 선행학습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녀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부모 마음은 그렇지 않다. 지난해 통계청 조사에선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키는 목적을 묻는 질문에 '선행학습'(59.9%)이란 응답이 '학교수업 보충'(52.3%) '불안 심리'(33.1%) '진학 준비'(32%) 등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복수 응답). 사교육을 잡으려면 선행학습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얘기다.

    선행(先行)학습

    학생의 나이·학년에 맞춘 학교 정규 교육 과정보다 진도를 앞서나가 다음 과정을 미리 배우는 것. '선행학습'을 '심화(深化)학습'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선진국의 경우 정해진 분량을 또래들보다 빨리 이해한 영재들은 나머지 시간 동안 관련 책을 읽거나 실험을 하고 전문가를 만나는 등 창의력·사고력을 기르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데 이것이 심화학습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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