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하루에 1달러… 맨손으로 폐선을 뜯어내는 노동자들

조선일보
입력 2009.07.18 03:15 | 수정 2009.07.18 22:51

'선박들의 무덤' 방글라데시 치타공 현장 르포

"1982년에는 6000t짜리 배를 부수는 데 1년3개월이 걸렸어. 그런데 1992년에는 4만t짜리 배를 6개월 만에 끝내버렸어. 어떤 때는 2만t 배를 23일 만에 흔적도 없이 없애버린 적도 있지. 근데 말이야,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이 뻘밭이 피바다가 됐었으니까…."

툭 던지듯 한 노동자가 말했다. 2008년 1월 처음 본 방글라데시 치타공 해변은 참혹했다. 이 해안에는 30여개의 선박 해체소가 있다. 거기서 2만여명의 노동자들이 맨손으로 매년 200여척의 대형선박을 감쪽같이 해치운다. '선박들의 무덤'이다.

KBS 5부작 다큐멘터리 '인간의 땅' 2편 치타공 취재를 위해 2007년 여름 이곳에 왔을 때는 사업장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제작팀은 세계적인 다큐 사진가 레자(Reza Deghati)를 만났다. 레자가 방글라데시 출신 사진가 오미에게 부탁했고 그가 선박해체소 사장 모신에게 사정한 뒤에야 겨우 현장에 가볼 수 있었다.

사진가 오미는 말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일하다 죽은 이가 있으면 그냥 바다에 버리면 됐어요." 우리도 그 노동자들처럼 될 뻔했다. 높이 10m, 무게 20t은 족히 나갈 철덩어리가 배 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찍는데 쇠덩어리의 충격으로 튀어오른 엄청난 진흙더미가 덮친 것이다.

현장 작업반장들이 난리를 쳤다. "그 철덩이를 간신히 앞쪽으로 당겼다" "당신들 쪽으로 떨어졌더라면 진흙밭에서 뼈도 못 추렸을 거다. 진짜 죽고 싶은 거야? 응?" 그랬다. 이곳은 배들의 무덤이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무덤이기도 한 까닭이다.

방글라데시 치타공 노동자들이 선박해체 작업을 위해 뻘밭을 지나 유령선 같은 폐선박으로 향하고 있다. / 박봉남씨 제공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해도 노동자들은 찡그리지 않았다. 순진한 그들은 카메라만 대면 웃었다. 하루 1~2달러를 벌기 위해 온몸으로 거대한 폐선을 뚜벅뚜벅 잘라낸다. 오염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싫어하는 존재가 있었다. 그린피스 또는 국제환경단체다.

어느 때인가 그린피스가 싱가포르에서 치타공으로 가는 폐선 한 척을 잡고 시위를 했다. 그린피스는 지금도 치타공의 폐선해체 산업이 야기하는 심각한 환경오염을 이슈화하고 있다. 따져보자. 대형선박은 통상 20년이 지나면 노후해서 보험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방법은 두 가지다. 타이타닉처럼 바다에 빠뜨리든가 아시아의 변방에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넘기든가. 놀랍게도 치타공의 선박해체소에 온 폐선들은 완벽하게 해체되어 100% 재활용된다. 철은 잘라서 제련소로 보내고, 선박용 엔진은 소중히 뜯어내 공장에서 사용한다.

더러운 변기와 세면기는 깨끗이 닦아서 도매상에게 넘긴다. 목재, 낡은 전선은 물론 전구 한 알까지 빼낸다. 폐유도 소중히 모아서는 새 기름에다 섞어서 판다. 폐기된 선박에서 버리는 것은 딱 한 가지다. 화장실에 있는 사람의 똥밖에 없다.

재작년 옆 사업장에서 가스폭발로 7명이 한꺼번에 죽어나갔다. 누구는 철판을 나르다가 발목이 잘렸다. 누구는 옆에서 튀어나온 앵글에 뇌가 관통됐다. 누구는 배 위를 걷다 귀신에 홀린 듯 허공에 붕 뜨더니 진흙밭에 처박혔다. 이런 수많은 비밀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다.

취재팀의 촬영기간에도 옆 사업장에서 장기르라는 젊은 청년이 죽어나갔다. 그 집에 갔을 때 형수의 첫마디가 이랬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먹고 살라고, 우리는 이제 다 굶어죽게 됐어요…." 사람 목숨보다 한 끼 밥이 절박한 곳이 이곳이다. 이들에게 폐선은 재앙이 아니라 허기진 배를 채워 주기 위해 '바다와 알라가 보내준 선물'이다.

에끄라믈, 12살 막내, 무거운 쇠줄을 끄는 이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방글라데시에서도 가장 찢어지게 가난한 북부의 쿠리그람이 고향인 녀석은 3개월 전 엄마 몰래 도망쳐 이곳에 왔다. "힘들어도 여기서 일해야 해요, 고향에 먹을 게 없어요."

치타공의 까마귀들은 철로 둥지를 짓는다(사진 가운데). 치타공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일을 하지만 하루에 1달러밖에 받지 못한다. / 박봉남씨 제공
이 아이들은 폐유와 석면덩이가 널브러진 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일하고 까불고 먹는다. 발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목에는 시커먼 쇳가루가 박혀도 상관없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세 끼 밥이니까. 점심시간, 아이들이 손으로 밥을 먹는다.

시커먼 때가 낀 세숫대야 같은 데서 밥을 퍼서 진짜 더러운 밥그릇에 밥과 절인 야채 몇 개를 놓고 기름 묻은 손으로 밥을 떠먹는다. 아!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대목에서 나는 내레이션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배를 곯아본 이들은 안다. 세상에 더러운 밥은 없으며 맛있는 밥만 있다는 것을….' 얼마 후 휴일, 이 친구들 숙소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접시에 더러운 밥을 가득 덜어주더니 먹으란다. 활짝 웃으며 말이다. 거절하면 서운하겠지…. 먹기 시작했다.

아! 켜켜이 쌓인 접시의 때가 자꾸 눈에 밟히더니 손으로 집을 때마다 기분나쁘게 미끈거리는 카레국물, 손으로 밥을 집어넣을 때마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어야 하는 고역, 옆에서 맛있다고 손가락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는 소리들…. 결국 나는 절반 이상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촬영감독은 쌀 한톨까지 다 빨아먹는 게 아닌가. 여기서 밝혀야겠다. 촬영감독 이름은 서연택이다. 훌륭한 사람이다. 그 뒤 내 말은 다시 바뀌었다. '세상에 더러운 밥은 없다, 하지만 먹기 힘든 밥은 있다.'

21살의 선박해체공 벨랄, 이 친구 참 순수한 웃음을 가졌다. 벌써 10년째 여기서 일하고 있다. 촬영 시작 2개월째 인 어느 날 벨랄이 절단작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와장창 소리가 나며 엄청나게 큰 파이프가 벨랄 위쪽으로 떨어졌다.

파이프가 10㎝만 더 안쪽으로 떨어졌으면 이 친구는 그 현장에서 목이 꺾인 채 즉사했을 것이다. 이날 벨랄이 즉사했다면 약 100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시신은 고향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저녁을 준비하던 벨랄이 어느 날 속내를 털어놓았다.

"죽을 때까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당신들한테 처음 말하는 거예요. 사실 나 결혼했어요 할머니가 강제로 장가보냈어요. 난 아직 아빠가 될 나이가 안됐잖아요? 그런데 지난 주 목요일 애가 태어났대요. 딸이래요. 두 눈이 안 보인대요. 아내에게 좋은 음식을 못 먹여서 영양실조로 그렇게 된거예요. 제 탓이에요…."

우리는 2008년 봄 3개월, 가을 20일, 2009년 봄 10일을 치타공에서 보냈다. 유난히도 까마귀가 많은 곳이었다. 까마귀들은 자꾸 철사줄을 물어갔다. 왜? 노동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로하깍'. 벵갈어로 로하는 철, 깍은 까마귀이니 철까마귀인 게다.

철사로 지은 둥지가 안락하지 않다는 것을 까마귀인들 왜 모르겠는가. 까마귀 부부는 우리가 철수를 하기 며칠 전 약간 파란 색깔을 띤 알 4개를 낳았다. 비자 연장이 더 안 돼 알을 깐 새끼 까마귀를 찍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치타공에서 우리는 벨랄의 고향 방문에 동행했다. 시력을 잃은 채 태어난 딸을 안아든 벨랄은 울었다. 그립던 아내와의 짧은 해후를 뒤로 하고 벨랄은 다시 치타공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혼자 있는 방에서 펑펑 울음을 쏟아낸다. 우리도 마음이 시려왔다.

1년 후,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벨랄은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5만다카, 우리 돈 80만원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던 벨랄의 꿈은 10년째인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가능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 선한 웃음의 젊은 노동자도 이제는 그것을 알지 모른다.

얼마 전 방송 준비를 마친 내게 방글라데시 현지 통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벨랄이 전화를 했어요. 딸이 죽었다고, 돈이 없어서 치료도 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죽었다고 말하면서 막 울어요."

가난은 슬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철까마귀들도 철사로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데 하물며 사람인 바에야. 치타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알몸이었다.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 어깨에 깊게 파인 상처들, 검게 이글거리는 피부. 단 한 사람도 군살이 없었다.

그 경이로운 육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이야말로 한 시대를 만들어냈던 빛나는 노동이었다고. 그 노동의 기억을 되살리는데 기여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그들의 선한 웃음이 그립다.

박봉남·독립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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