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발레리나 서희(23)씨는 마지막 커튼콜에 불려 나왔다. 세계 최고의 공연장으로 꼽히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3800여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줄리엣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낸 그녀에게 환호하며 길게 박수를 쳤다. 세계 5대 발레단의 하나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서 한국인이 최초로 전막(全幕)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을 소화해낸 순간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꿈이 이뤄졌습니다." 공연 직전까지도 "담담하다"고 말했던 서씨는 9일(현지시각) 저녁 세 시간의 공연이 끝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강수진 등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 5대 발레단에서 주역을 맡은 경우는 없었다. 서씨가 이번에 ABT 전막 발레의 주역으로 데뷔함으로써 한국 발레는 국제콩쿠르에서 기량을 인정받는 단계를 넘어 프로발레단에서 월드스타로 성장할 수 있는 무용수를 배출하는 단계로 진화했다.

9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드라마틱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서희(오른쪽)가 줄리엣으로 춤추고 있다.

지난 1월 ABT에서 군무(群舞)를 추던 그녀를 일약 줄리엣으로 발탁한 예술감독 케빈 매킨지는 담담하게 "(서희가) 주역을 맡을 만큼 성숙했다"고 말했다. 매킨지 감독은 "서희는 발레에 너무도 적합한 체형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관점과 감각이 있다"며 "ABT에서 서희의 미래는 밝으며 줄리엣 같은 배역이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이날 무대 위에서 서씨는 로미오역을 맡은 ABT의 신예 스타 발레리노 코리 스턴스씨와 함께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환생한 것처럼 어린 날의 애틋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그려냈다. 유모와 장난치는 순수한 줄리엣이 로미오와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로미오와 발코니 파드되(2인무)를 추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숨을 죽였다. 막간에 관객들은 "여주인공의 쓰러지는 연기 모습이 정말 놀랍다"고 감탄했다.

미국의 무용 전문지들은 서씨에 대해 "우아한 팔 움직임, 숨 막힐 정도로 가벼운 점프, 완벽한 균형, 클래식과 모던 발레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지녔다"고 칭찬했다. 발레 잡지 '포인트'는 지난해 1월호에서 '2007년 가장 인상적이었던 무용수'로 소개했다.

서씨는 1999년 선화예술학교에 재학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2002년 뉴욕 국제발레콩쿠르에서 은상, 2003년 스위스 로잔콩쿠르에서 입상한 뒤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받았다. 2005년부터 ABT 정식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씨는 타고난 재능도 있지만 엄청난 노력을 하는 연습벌레로 알려져 있다. 서씨는 "발레는 무대에서 라이브 공연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며 "두려움을 이기려면 연습밖에 없다"고 말했다. 리허설을 하지 않더라도 발레슈즈를 꿰매고, 발레에 필요한 운동을 하는 등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게 발레라고 했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물었더니 철학적인 답이 돌아왔다. "매일 성실하게 알차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예술가 칭호를 듣는 존경받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