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140]

조선일보
    입력 2009.07.09 03:16

    제12장 애국계몽의 전선(戰線)에서

    안중근이 막막하여 더 치열해진 애국계몽운동의 전선을 내닫고 있는 사이에 1907년의 봄이 다해갔다. 벌써 초여름의 더위가 느껴질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안중근이 집을 나가지 않고 있는 아침나절 누가 대문 밖에서 주인을 찾았다. 막내 공근마저 경성 사범학교에 들어가 집을 나간 바람에 중근이 몸소 나가 맞아들여 보니 흔치 않게 의관을 갖춘 나이 든 선비였다. 기상이 활달하고 위풍이 당당한 게 자못 도인의 풍모가 있었다.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요?"

    손님을 방안으로 맞아들인 안중근이 그렇게 묻자 그 늙은 선비가 대답했다.

    "나는 백암(白巖:박은식)과 동방(同榜) 급제를 하였네만, 망국을 바라보고만 있는 처지라 진사 소리조차 듣기 민망한 늙은이 김 아무개라고만 알아두게. 자네 선친 안 진사와는 일찍부터 교분이 두터웠고, 한때는 청계동 신천의려의 막빈(幕賓)으로도 있었네. 아마도 자네가 해주 싸움에서 돌아와 심하게 앓고 있던 무렵의 몇 달일 것이네. 안 진사가 그토록 허망하게 세상을 버리자 나도 한때는 깊은 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미련한 이 목숨 끝나기나 기다리려 했네. 허나 모진 세상살이의 인연을 끊지 못해 아직도 이렇게 저잣거리를 어정거리다가 자네 형제 사는 모양을 듣고 특별히 권할 말이 있어 찾아왔네."

    일러스트 김지혁
    "선생님께서 일부러 멀리서부터 찾아와 주셨으니 무슨 좋은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그 말이 허투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중근이 그렇게 공손하게 받았다. 그러자 김 진사가 삼엄한 안색이 되어 물었다.

    "을사년 보호조약 이래, 분한을 못 이긴 충신열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혹은 의병이 일어 방방곡곡을 선혈로 물들이고 있으나, 지금 이 나라 형세는 실로 거센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없네. 조정을 대신해 왜적의 통감부가 이 나라를 다스리고 그 통감 이등박문이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조선의 왕 노릇을 해온지도 벌써 한 해가 넘었네. 이대로 두면 언제 왜적이 옥좌까지 차고앉을지 모르겠네. 그런데 이토록 나라가 위태롭게 된 때에, 자네와 같은 기개를 지니고서도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려 하는가?"

    "아버님 할아버님의 유명(遺命)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다만 당장은 이밖에 없을 듯해 교육과 계몽에서 구국의 길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민력(民力) 양성을 위해 두 학교를 맡아 운영하고 있고, 나라 재정을 파탄에서 구하는 일은 우리 일족 모두가 국채보상운동에 나서 좋은 결실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또 진작부터 서우학회(西友學會)에 나가 중지(衆智)를 모으고 흩어진 민인(民人)을 한 목적 아래 묶는 일에도 나름의 정성을 보태고 있습니다."

    "자네가 하는 일도 귀하나 그것만으로는 안 되네. 이미 이 나라의 자주독립은 이 백성을 혀끝으로 달래고 붓끝으로 깨우치는 것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렇다면 달리 무슨 묘책이 있습니까?"

    "지금 백두산 너머 있는 서북 간도와 노서아 땅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는 우리 동포 백여만 명이 살고 있다고 하네. 거기다가 그 땅은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한 번 크게 뜻을 펼쳐볼 만한 곳이라 하네. 내가 보기에 자네 재주와 기개라면 그곳에 가서 반드시 엄청난 공업을 이룰 것이네."

    거기까지 듣자 뒤는 더 듣지 않아도 김 진사가 무슨 일을 권하러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 다를 뿐, 일찍이 아버지 태훈이 살아 있을 때 안중근 부자도 한 번 의논해본 적이 있는 투쟁방안이었다. 그래서 몇 달 산동 지방을 돌아보고 상해를 떠돌다가 르각 신부를 만나 나라 밖으로 이주하는 계획을 접게 되었던 것이지만, 안중근에게는 마치 그런 김 진사의 말이 생판 처음 듣는 묘책처럼 들렸다. 지난 2년 한편으로는 서투른 가장(家長)으로서 책무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만 요란할 뿐 아무것도 잡혀오는 것이 없는 교육사업과 계몽활동에 지쳐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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