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에겐 '미풍', 약자에겐 '태풍'

조선일보
  • 조중식 기자
    입력 2009.07.01 03:05

    '비정규직 대란' 산업현장이 느끼는 고통은…
    대기업들은 혼란 없지만 중기(中企)는 계약해지 속출…
    열악한 여건의 노동자가 해고 위험에 더 내몰려

    경기도 안성에 있는 밸브 제조업체인 K사는 최근 비정규 계약직원 5명에게 "계약을 갱신할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통보했다. 전체 직원이 180여명에 달하는 이 업체는 포장업무와 사무보조 업무를 비정규 직원에게 맡겨왔다. 그들 중 근무기간이 곧 2년을 채우는 사람이 5명인 것이다. 이들 5명은 회사의 경영 사정과는 전혀 무관하게 단지 비정규직법의 '2년이 넘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졸지에 일자리를 잃게 됐다.

    이 업체 사장(56)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면 1인당 인건비를 평균 50만원 정도 더 부담해야 한다"며 "숙련된 사람들을 내보내는 게 안타깝지만 회사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여야가 비정규직법상의 '2년 사용기간 제한' 조항이 적용되는 7월 1일이 되도록 공방만 벌이면서 법 개정을 미루는 바람에 산업현장 곳곳에서는 비정규직 계약해지(해고) 문제로 신음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들은 일찍부터 이런 사태에 대비를 해둔 상태라 큰 혼란이 없으나, 해결책이 마련되기만을 기다려온 영세·중소기업들은 막다른 궁지에 몰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기업엔 미풍, 중소기업엔 태풍

    삼성전자·현대자동차·포스코·현대중공업 등 대기업들은 비정규직 2년 사용기간 제한 조항에도 불구하고 전혀 동요가 없다. 관련 조항에 해당하는, 직접 고용하고 있는 계약직 비정규 직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울산공장 생산현장에 정규직 근로자 2만7000여명과 100여개 사내 하청업체 근로자 6000여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하지만 사내 하청업체 근로자들도 그 업체의 정규직인 경우가 많아 이번 법 시행 때문에 생산 현장이 큰 영향을 받는 일은 없다고 현대차 관계자가 말했다.

    삼성전자는 전체 직원 8만4000명 중 1%가량을 비정규직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직접 고용한 계약직 사원이 아니라 파견업체에서 보낸 파견사원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비정규직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이런 사태에 대비해 문서수발 등 단순업무는 별도 회사를 세워 분사했다"며 "주로 비서직을 파견사원이 맡고 있는데 이들의 경우 2년마다 새 직원을 파견받는 것이 완전히 정착됐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높은 유통업계의 롯데·신세계·홈플러스 등도 비정규직법 제정 직후인 2007년 비정규직 파트타이머들을 별도 직무를 신설해 정규직으로 전환, 큰 영향이 없었다.

    영세·중소기업, 병원, 대학들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이미 올 연초부터 계약기간이 만료된 비정규직에 대한 계약 해지 통보가 속출했다. 예컨대 경남 김해에 있는 직원 23명의 철강업체 D사는 지난주 비정규직 직원 5명 중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있는 3명에게 '계약갱신 불가'를 통보했다. 보훈병원도 고용기간 2년을 채운 조리사·행정기능직·시설기능직·간호조무사 등 비정규직 20명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철강업체 D사 사장은 "우리 같은 영세 업체는 인건비가 10%만 올라도 살아남기 힘들다"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면 학자금 지원 등 복리후생비 부담이 늘어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90% 이상이 직원수 300인 이하의 중소기업에 몰려 있는 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의 대량 해고가 현실로 닥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경총 이동응 전무는 "해고된 비정규직 일자리를 다른 사람이 찾아 들어가긴 하겠지만 아예 그 일자리를 없애는 기업도 적지 않을 것"이라며 "최소 30만~40만명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약자에게 고통 집중

    기업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 비정규직 중에서도 급여나 근무 여건이 열악한 사람들일수록 이번 법 시행으로 더 곤경에 빠지는 양상이다. 예컨대 2년간 연평균 소득이 일정 수준(작년 기준 약 6900만원) 이상인 비정규 계약직원은 2년 사용 기한 제한 적용을 받지 않는다. 또 자동차업체의 사내 협력업체 직원들은 상대적으로 큰 타격이 없으나, 급여수준이나 근무 여건이 훨씬 나쁜 2~3차 협력업체의 비정규직은 해고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실제로 자동차 부품업체인 A사는 80여명 비정규직 중 근무기간 2년이 가까워지는 40여명은 올해 중 순차적으로 내보내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 채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들의 급여수준은 잔업이 없을 경우 100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대기업의 정규직 '귀족노동자'가 주력인 노동계에 휘둘려 힘없고 약한 중소기업, 비정규직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2년 제한' 조항 때문에 파견 근로자들의 대량 이동도 불가피하다. 인력파견업체인 위드스탭스 이상철 사장은 "파견근로자 중 그 회사의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비율은 1% 미만"이라며 "이들은 2년이라는 제한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잃고 새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시간과 금전적인 비용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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