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 치료 중단" 환자가족 요구 빗발… 병원마다 '존엄사(死) 지침' 달라 갈팡질팡

입력 2009.06.26 03:12

국내 식물인간 상태 환자 3000여명
'존엄사'

경기도 안양시 샘병원의 환자 A모(57)씨는 지난 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중환자실에서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인공호흡기를 달게 됐다. 자발(自發) 호흡은 미약하게 있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 산소 공급이 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그러다 지난달 21일 대법원의 '존엄사(尊嚴死) 판결'이 나온 이후 가족 측은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하고 있다. 무의미한 연명 치료라는 것이다. 병원은 윤리위원회를 열어 A씨 상태가 '사망 임박 단계'라고 볼 수 없고 치료를 계속하면 최소한 현 상태는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공호흡기 제거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가족 측은 세브란스병원의 김모(여·77)씨에게 존엄사가 시행되자 치료 중단을 거듭 요청하고 있다. 샘병원에는 A씨 외에 두 명의 식물인간 상태 환자 가족들이 잇따라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하고 있다.

박상은 샘병원 의료원장은 "세 명 모두 대법원이 제시한 존엄사 요건에 미치지 못해 허락하지 않고 있다"며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난감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대법원 판결에 따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김 할머니에 대해 '존엄사' 시행에 나선 이후 각 병원에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식물인간 환자 가족이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구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중환자실 연명(延命) 치료 비용만 하루에 15만~25만원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가족들로선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연명치료 중단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현재 3000여 명의 식물인간 상태 환자가 각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인천시 B병원 중환자실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지속적인 간질 발작 증세로 이모(여·74)씨가 인공호흡기를 단 채 누워 있다. 대뇌 기능이 상당 부분 소실된 상태로 의식 없는 상태가 열흘을 넘었다. 의료진은 회복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자 이씨 가족 측은 "할머니가 평소에 인공호흡기 치료에 거부감을 보였다"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주장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의 김 할머니 처지와 유사하다. 하지만 병원은 환자의 의사를 명확히 확인할 제도가 없는데다, 혈압과 맥박 등 생체 지수가 정상이라며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대법원이 김 할머니 판결과 관련해 제시한 존엄사 요건은 3가지였다. ①의식 회복 가능성이 없고 ②중요한 생체 기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③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것이 명백할 경우, 인공호흡기 등 생명 연장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할머니가 인공호흡기 제거 후에도 자발호흡을 하면 생명을 이어가자 이 요건이 결과적으로 틀어졌다. '사망 임박'이 아님에도 생명 연장 치료가 중단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의료현장에서는 비슷한 처지의 식물인간 환자를 놓고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서울대병원의 '존엄사 지침'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종양내과 허대석 교수는 "그런 상황일 때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며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로 연명 치료를 하고 있는 경우가 판단하기 제일 어렵다"고 말했다.

대한중환자의학회 고윤석(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회장은 "인공호흡기를 뗀 후 자발호흡을 하는 경우는 의학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해서 대법원의 판단이 틀린 게 아니다"며 "각 병원이 운영하는 존엄사 지침이 큰 틀에서 법원의 요건에 맞으면 그대로 시행해도 된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대부분 대학병원들이 자체 지침을 갖고 회생 불가능한 말기 환자들에게 생명 연장 치료 중단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며, 각 병원마다 존엄사의 기준·지침도 차이가 나서 분쟁과 갈등의 여지가 남아 있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기획조정실장은 "지금의 혼란은 임종 환자 관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라며 "누가, 어느 시점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통일된 지침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와 병원협회 등은 지난 23일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 중단 가이드라인 제정을 위한 태스크 포스팀을 만들고 오는 9월 구체적인 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보건복지가족부 김강립 국장은 "생명을 다루는 문제라 신중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입장이 아니다"며 "의료계의 가이드라인이 나오면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식물인간

의식을 관할하는 대뇌 기능은 죽었지만, 그 밑 호흡 중추가 있는 뇌간(腦幹) 기능은 살아 있는 상태. 숨 쉬고 심장 박동은 하나 의식은 없다. 이 상태가 3개월 이상 지속되면 식물인간이라 부르며, 영양만 공급되면 생명은 상당기간 유지된다. 반면 뇌사(腦死)는 대뇌와 뇌간 모두 죽어 있는 상태로, 1~2주일 후면 심장 박동이 멈춰 사망에 이른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