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7080의 남자' 배철수

조선일보
  • 선임기자
    입력 2009.06.22 03:08 | 수정 2009.07.14 13:42

    "자유롭게 살려고 음악했는데… 월급쟁이보다 더 짜인 삶 살아"
    '역시 배철수' 소리 대신 '이건 뭐야' 반응 나올까봐 10집 음반 여태껏 못내
    25년간 셋방살이… 중학교 1학년때 산 교복 고교 졸업 때까지 입어
    외모가 지저분해 구창모가 노래 부를 때 같이 무대에 못 선 적도



    "그냥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도 바쁩니다"하고, 배철수(56)씨는 방송 스튜디오에서 말했다. 초대손님 석에 앉은 내가 묻는 역할이었다. 좀 지나면 그는 여기서 팝송을 틀고 생방송을 진행할 것이다.

    20년간 그는 이 방송 진행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래서 20년간 저녁 약속을 못했다. 규칙적으로 밤 9시에 귀가해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자유롭게 한번 살아보자고 음악을 했는데, 제가 월급쟁이 회사원보다 더 짜인 삶을 살고 있으니, 어떨 때는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이건 록밴드 정신에 위배되는 게 아닙니까?

    "정말 위배되죠."

    그러면서 그는 MBC 라디오의 '음악캠프' 진행을 7000회 넘겼고, KBS '콘서트7080'을 5년째 진행하는 중이다.

    ―젊은 시절의 낭만이 결국 생업(生業)에 굴복한 것입니까?

    "그건 좀 다릅니다. 5, 6년 됐을 때쯤 '이걸 계속 해야 하나. 더 잘할 수 있고 자유로운 게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잘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남의 노래를 소개하는 입장이 됐는데, 가끔 내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욕망이 괴롭히지 않나요?

    "제 프로에는 세계 최고의 연주자와 가수들의 음악이 나갑니다. 검증된 히트곡이 아니면 이역만리에서 이곳까지 못 오죠. 그런 음악을 계속 듣고 소개하고 있으면, 저와는 점점 더 거리가 느껴지죠. '내가 음악을 그만두길 잘했구나'라고. 저는 성격이 소심해서 그런지, 제 자신이 더 높은 대우를 받거나 위로 올라가면 굉장히 불안합니다. 올라가고 싶지 않습니다."

    ―몰래 가명(假名)으로 하고 싶은 생각은 들 법한데.

    "하하하, 그 생각을 한번 해보기는 했죠. '음반을 만들어서 다른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발표하면 어떨까'라고. 구창모씨를 만나면 '송골매 앨범이 9집까지 나오고 끝났다. 마지막 10집을 내고 멋있게 손을 털면 어떻겠냐' '좋은 생각'이라고 서로 얘기는 합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 친구도 사업한다고 바쁘고, 음악을 하려면 모든 걸 바쳐야 하거든요.

    지금 음악하는 후배들이 '선배 음악을 듣고 감명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음악하면 '역시 배철수'라는 소릴 들어야지, '이건 뭐야' 들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부담도 있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러운 음반을 만들 수 없거든요."

    ―현재 국내 최고의 가수는 이효리이겠죠? 아니면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소녀시대, 원더걸스인가요?

    슬쩍 찔렀는데 금방 반응이 왔다. "그건 절대 동의 못하죠"라고.

    "이효리가 뛰어난 엔터테이너라는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효리가 심수봉씨보다 노래를 잘합니까. 이효리의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 있나요? 젊은 친구들한테 '너희들 노래는 7080 노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춤이나 추는 노래지 그게 무슨 음악이냐. 우리 시대 음악을 한번 들어봐라'고 합니다. 노래방에 가서 젊은 애들한테 잘 보이려고 괜히 혀도 안 돌아가는 그런 노래를 따라 부르지 말고, 자녀들 앞에서 '우리는 너희보다 좋은 음악, 수준 높은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며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배철수씨는 “성격이 소심한지 나 자신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으면 불안하다”고 말했다. MBC 라디오 스튜디오에서./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세월은 전진했는데, 지금보다 그때 노래가 더 좋다면 되겠습니까?

    "요즘 우리 노래는 메시지는 없고 감각만 발달했어요. 편곡이나 포장만 잘 돼 있죠. 지금 활동하는 가수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봅니다. 조용필 송창식 김민기, 서태지까지, 어느 누구도 이 사람들을 뛰어넘기 어려울 겁니다. 팝음악의 전성기는 60, 70년대로 비틀스 이후 수많은 록밴드와 가수들이 나왔지만 비틀스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클래식에도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지요."

    ―개인 취향으로 국내 가수 중 누구를 제일로 칩니까?

    "멜로디와 가사의 아름다움, 히트곡의 수에서도 송창식 선배가 최고라고 봅니다. 내가 방송을 하는 입장에서 괜히 얘기했는데…. 최백호 선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심수봉씨도 좋고. 작곡가로서는 신중현 선생님이 제일인데, 노래는 잘 못하지만(웃음)."

    ―'콘서트 7080'에는 방송 무대를 잃은 그때의 가수들이 서로 다투어 서려고 하지요?

    "자주 나오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지만,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가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아예 안 나오려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출연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고 싶어요.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수식어를 붙여서 빛나게 해줍니다. '지금 소녀시대가 있지만, 진미령씨는 그때 소녀시대보다 더 인기가 있었고 더 예뻤다. 아직도 소녀 같다. 외모가 꼭 소녀 같진 않아도 마음은 소녀 같다'는 식이죠. 출연자들보다 방청석 경쟁률이 더 셉니다. 매주 꽉꽉 채우는 것을 보면 우리 세대가 문화적으로 너무 목말라 있다는 생각이 들죠."

    ―진행을 맡으면서 세월에 의해 변한 출연자의 모습에 놀란 적이 있습니까?

    "윤항기 선배 같은 분은 과거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것 같아요. 너무 마르고 강퍅한 인상이었는데 나이 들어 온화한 얼굴이 됐어요. 꽃미남이고 멋있었는데 이젠 머리도 벗어진 중년이 된 분도 있어요. 연민의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 나이를 실감하죠. 저도 내일모레 60이 돼가니…."

    ―젊었을 때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얼굴이 훨씬 좋아진 것 같다는 말을 안 듣습니까?

    "많이 듣죠. 어려서부터 제가 워낙 노안(老顔)이라, 20대부터 40대로 보였다고 해요. 젊은 시절 산발 머리에 괴상하게 하고 다녔으니까. 그때보다 저는 상대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변한 거죠. 당시 방송 무대에 청바지 입고 올라간 게 우리 밴드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록밴드도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입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출연을 안 시켜줬으니까요."

    ―방송사에서 허락 안 해주던 것을 왜 송골매에게만 허락해줬죠?

    "글쎄, 우리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또 우리 팀에는 구창모라는 방송 적합한 인물도 있었잖아요. '모두 다 사랑하리'가 1위를 했을 때, 담당 PD가 조용히 와서는 '구창모가 노래를 부르니까 넌 안 나오면 안 되느냐'고 해요. 저 대신 기타를 칠 다른 멤버도 있었고. 저는 근처 당구장에서 당구 치면서 혼자서 TV로 그 프로를 본 적도 있어요.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죠."

    ―대중적으로 더 인기가 있었던 보컬 구창모씨에 대해 시샘이 좀 있었지요?

    "전혀 없었어요. 전 '송골매'라는 회사의 오너로서 유능한 CEO를 영입했다고 생각한 거죠. 매니저 없이 제가 그 팀을 다 이끌었으니까요. 밴드 리더이면서, 멤버, 매니저, 음반 프로듀서이기도 했지요. 어쩌면 구창모씨로서는 팀에서 겉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어요. 그때 사이가 안 좋아 원수처럼 헤어졌다면 이렇게 만날 수가 없죠."

    1980년대를 풍미한 록밴드 ‘송골매’. 왼쪽 두번째가 배철수, 세번째가 구창모다.
    송골매는 1979년 '세상만사'라는 앨범을 내면서 인기 있는 록그룹으로 떠올랐다. 그 뒤 구창모가 보컬로 합류해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처음 본 순간' '산꼭대기 올라가' '빗물' 등 히트곡을 날리며 9집 앨범까지 냈다.

    ―송골매 그룹이 해체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밴드 생활을 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음반이 그렇게 팔려도 로열티는 한푼도 없고 회사로부터 전속금을 받는 게 끝이었어요. 방송출연료도 악기를 빌려 운반해가면 운반비 정도밖에 안 됐어요. 방송을 할수록 점점 손해죠. 나이트클럽에서 밤새워 연주해 팀을 꾸려 가는 운영비를 벌었어요. 10년 동안 현충일 하루 쉬고 364일 밤새워 연주했다고 보면 됩니다. 나중에는 음악하는 게 너무 싫고 힘들었어요. 구창모씨도 그게 싫었을 거예요. 솔로가수로 활동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밤새워 고생을 안 해도 되고…."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로 인기상을 받은 1978년 해변가요제에 나갈 때는 주최측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오라고 해서 깎았다고 들었는데, 그래 콧수염은 언제부터 길렀습니까?

    "글쎄, 서른 살쯤에 길렀을 겁니다. 그게 '록 스피릿'(정신)이라고 생각했죠. 젊은 치기도 있었으나, 정돈되는 것은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걸로 여겼죠. 상식과 늘 다르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버스를 타면 중간바닥에 책을 놓고 앉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록정신에는 술이 빠질 수 없는데, 술은 잘 못 마신다고 들었는데.

    "대학에 입학해 막걸리를 사발로 마셨는데, 6개월간 계속 마시고는 엎어졌어요. 제게는 유전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는 것 같아요. 군대 이후로 술을 안 마셨습니다. 대신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놓고 두세 시간씩 떠드는 걸 더 좋아해요. 그러니 이런 방송 DJ가 체질적으로 맞는 겁니다. 그동안 하루도 방송을 안 빼먹은 걸 보면 내가 답답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지만요."

    ―20년간 저녁 약속이 없었다는데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나요?

    "대신 점심 약속을 합니다. 정치인처럼 조찬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요. 그런데 정치인은 왜 조찬 약속을 합니까? 그렇게 바쁩니까?"

    그렇다고 하자, "그분들도 저처럼 바쁘군요. 그게 항상 궁금했어요"하고 답변했다.

    "제가 딴따라라 그런지, 정치 뉴스가 신문에 너무 많아요. 선진국 학교에는 체육시간이 많고 악기를 하나씩 다루고 그림을 그리도록 합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보면 삶의 즐거움은 국영수(國英數)가 아니라 이런 문화적인 데서 오는 게 아닌가요."

    ―젊은 날 무슨 고민을 가장 많이 했습니까?

    "일곱살 되던 해 선친께서 사업에 실패해, 25년간 단칸방에서 셋방살이를 했어요. 몇 푼 안되는 중학교 등록금을 못 내고, 중학교 1학년 때 입은 교복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입었어요. 앞뒤로 기워 옷감이 아니라 누더기였지요. '난 공장에서 기술을 배우겠다'며 고등학교 진학도 안 하려고 했어요. 날마다 죽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사회에 나가 빨리 돈 벌어 살아보자, 내 집에서 한번 누워보자 하는 원초적인 바람뿐이었지요. 항공대에 들어간 것도 국립이라서 학비가 쌌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분이 공부는 않고 '잘못된' 길로 휩쓸려갔군요.

    "대학에서 아마추어 밴드에 들어간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악기로 협주를 할 때 화음이 맞춰져 나오는 그 기분이란, 연주를 안 해본 사람은 이해가 안 될 거예요. 록 음악을 따라 하다 보니 그 사상에도 빠져들게 됐어요. 자유, 사랑, 평화… 젊은 친구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다 있었던 거죠. 운명적이었죠."

    ―그래서 그때 밥벌이 취업도 안 한 겁니까?

    "대학 졸업 무렵 교수님으로부터 항공사 추천서까지 받아놓고 일주일간 고민했어요. 그때 두살 아래 동생이 같은 해에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이 된 거예요. '네가 집안만 책임진다면 난 음악을 해보고 싶다'고 하니, 동생이 흔쾌히 승낙했어요. 동생이 없었다면 취직했을 거예요."

    생방송 시작 15분을 남겨두고,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요즘에는 가끔 제 삶이 너무 행복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사회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많을 텐데…. 나는 초년 고생이 심해서 이제 편하게 산다고 농담 삼아 말하죠."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