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칼럼]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조선일보
  • 김대중·고문
    입력 2009.06.21 20:02 | 수정 2009.07.10 20:17

    만인이 만인의 적이다 세상은 막가고 있다
    욕설과 저주와 인격살인이 사회의 기본을 뭉갰다
    진정 우리를 구원해줄 '개조론자'는 어디 있는가

    김대중·고문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두가 귀 막고 타협 없이 자기 말이 옳다고 막무가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그 꼴이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은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기만이 옳다며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세상에 혀를 찬다. 여당도 지리멸렬이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집안싸움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다수당이라면서 법안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죽을 쑤고 있다. 야당 역시 가관이다. 법치(法治)를 무시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죽은 전직 대통령에 기숙(寄宿)하는 수준이다. 교수사회, 시민단체, 이익단체들도 오로지 자기 주장에만 매달린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만인(萬人)이 만인의 적(敵)이다. 모두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야단이고 조그만큼의 차이에도 체면불구하고 으르렁댄다. 여기저기서 '적개심'이 난무하고 '촛불'이 횡행하며 서로의 '생명줄'을 끊으려고 '광적'으로 돌진한다. '북한'을 놓고 나라가 둘로 갈리다시피 하고 거기다가 남과 북은 이제 바야흐로 마주 달리는 궤도에 올라탔다. 안에도 적(敵)이고 밖에도 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소통과 통합과 단호함의 정치를 주문해왔다. 그 많은 주장과 생각을 종합하면 거기에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론이고 그것이 민심이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그것은 '자기의 길'이 아니라며 '근원적 처방'이라는 암호 같은 소리 뒤에 숨고 만다. 그는 남의 말을 마지못해 듣는 척할 뿐, 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한나라당은 어찌 보면 정당도 아니고 집권여당은 더더욱 아니다. 지도부가 있는지는 몰라도 리더십은 눈 씻고 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다. 제각기 '나 홀로 장군'이고 '흩어진 졸병'들뿐이다. 이쯤 되면 당 지도부는 과감히 물러나야 한다. 당이 혼돈에 빠진들 지금보다 더하겠는가. 그것이 오히려 변화의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민주당에는 더 할 말도 없다. 골수 지지층을 제외하고는 국회에 들어가 싸울 것을 바라고 있다. 법안과 정치사안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반대할 것은 분명히 기록에 남겨 자신들이 집권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차기를 기약하는 길이다. 그것이 의회정치고 민주정치다. 민주당은 지금 방황하는 집권세력을 더 골탕 먹일 모양인데 모멘텀을 잃으면 오히려 민심을 잃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유념해야 할 것은 골수 지지층이 아니라 광범위한 중간층과 한나라당 이탈층이다.

    이것들은 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말들이다. 그런데도 정치권, 운동권들은 아랑곳조차 하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견해에는 칼질을 해대고 자기들의 폐부를 찌른 주장에는 욕설과 저주로 대응한다. 그래서 이제는 무슨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는 것이 두려울 정도다. 충고 같은 비판인데도 들은 척하지 않다가 강도를 높인 비난에는 악착같이 달려들어 인격적 살인을 해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소통,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치권력과 이념의 문제만도 아니다. 사회의 기본이 망가진 상태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와 약속의 정치가 밑바탕에서부터 깨진 상태에서는 우리는 촌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길, 제3의 길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리더십의 부재(不在),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민심, 제각기 자기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지도층의 욕심, 오직 반항과 파괴로만 치닫는 저소득층의 비타협이 난무하는 사회로는 바람직한 22세기 진입이 어렵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의 글에서 오늘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그 글을 쓴 시점과 상황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어도 그의 민족개조론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양보하며 타협할 것은 타협하고, 원칙을 지킬 것은 칼처럼 지키는, 그런 시대가 열리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그곳으로 끌어갈 지도자를 원한다. 지금처럼 '너희들은 떠들어라. 우리는 우리 식대로 간다'는 식의 무뢰배 정치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만인 대(對) 만인의 싸움'에서 구제해줄, 진정한 개조론자를 원한다. 오늘의 상황에 실망하고 우리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에 절망하며 더 이상 이렇게 떠밀려 갈 수 없다는 대한민국 국민의 절박한 심경을 헤아릴 줄 아는 그런 지도자를 원한다. 데모 공포증 없이, 마이크의 소음 없이, 욕설·저주 섞인 댓글 없이 매일의 안정된 생활에 매진하는 화목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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