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조선일보
  • 정병선 기자
    입력 2009.06.20 03:06 | 수정 2009.06.21 08:38

    고려인으로 北문화선정성 차관 지낸 정상진씨 증언

    정상진씨가 북한 정권 수립과정과 6ㆍ25전쟁에 대해 증 언하고 있다.
    "북한 정권 수립과 6·25 전쟁에는 고려인(高麗人)들이 깊숙이 개입돼 있었습니다. 6·25를 알리는 신호탄도 당시 소련군 소속 고려인 유성철(柳成鐵)이 쐈습니다. 전쟁에는 고려인 428명이 참전했지요. 북한은 해방 후 20년 역사를 위조했어요. 제가 죽는다면 더 많은 사실이 왜곡될 겁니다."

    정상진(鄭尙進·91)씨는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차관)으로 김일성(金日成)의 측근이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려인들은 소련의 계획 아래 북한 정권 수립 때 각 부서의 2인자에 임명됐다"고 했다. 북한이 소련에 철저히 통제당한 꼭두각시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 13년간 머물렀다. 1945년 소련의 '붉은 군대'에 입대해 그해 8월 '조선해방을 위한 상륙작전'에 소련군의 일원으로 북한 땅을 밟은 뒤 1957년 북한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그는 당시 소련군 태평양함대 사령부 산하 해병대 직속 정찰부대원이었다.

    "일본군을 내몬 뒤 소련 정부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해방 후 원산항(港)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맞으러 간 것도 접니다. 소련은 고려인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어요.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어요."
     
    (위부터)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서에 서명하는 김일성.조선일보 DB/ 6ㆍ25 당시 북한군 전력의 중추였던 소련제 T-34 탱크.조선일보 DB /1955년 소련 순회공연 당시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상진(오른쪽 끝)씨가 북한문화예술단원 들과 함께 시내를 걷고 있다. 정씨는 공연을 마치고 돌 아온 직후 숙청됐다.정상진씨 제공

    그는 김일성의 귀국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1945년 9월 19일 추석날 오전 8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 해군함 '푸가초프'를 타고 원산항에 왔어요. 나와 원산시 인민위 부위원장 태성수, 시 공산당 조직부장 한일무, 시 상공부장 박병석 4명은 소련군 25군 정치부의 명령을 받고 마중 나갔지요. 저는 당시 시 인민위 문화부장으로 정율(鄭律)이란 이름으로 불렸지요."

    정씨는 놀랍게도 '김일성'이 없었다고 했다. '푸가초프' 함에서 내린 일행은 김성주와 부대원, 유성철을 비롯한 고려인 등 10여명이었다. 정씨가 선두에서 서서 배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을 접견하자 그는 '김성주입니다' 하고 악수를 청해왔다는 것이다.

    "정치부에 '김일성이란 자는 없다'고 하자 '김성주가 있더냐'고 물어요. '예'라고 했더니 '바로 그자가 김일성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놀랄 수밖에 없었지요. 33살에 붉은 군대 장교 복에 카피탄(대위) 계급장을 달고 적기 훈장을 달고 내린 자가 김일성이라니…."

    김일성 일행은 기차 편으로 평양으로 떠났다. 이 김일성이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한 달 뒤인 10월 14일 '조선의 해방자 소련군 환영대회'였다. 하지만 이날이 실질적으로 '김일성 환영대회'였다. 모든 게 소련의 각본이었던 것이다.

    정씨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되자 고려인은 전쟁 참전 명령을 받았다. 당시 나는 총참모부 병기총국 부국장이었으며 김일성을 수시로 만났으며 1952년 전시에 김일성이 직접 불러 '고생했다'며 '문화선전성 제1부상을 맡아 달라'고 해 수락했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이승만 정권의 북침으로 발생한 것으로 알았어요. 북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승만 정권이 북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북한 라디오에서 들었고 남측 국방장관이 '북한을 공격해서 평양에서 점심 먹고 압록강에서 저녁을 먹겠다고 하는 말을 했다'는 소문도 있었거든요."

    그해 12월 김일성을 만나고 나오면서 총참모부 사령부를 찾아가 유성철을 만났다. 유성철이 "야 너 술 한잔 하자"고 해 평양시내 술집으로 갔다. 딱 둘이 앉아서 술을 마시는데 불쑥 그가 "처음 하는 말인데 이건 절대 비밀"이라며 이런 말을 했다.

    "전쟁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 시작한 거야. 나도 북침으로 생각하고 참전했어…." 정씨는 그때 비로소 전쟁의 원인을 알았다고 했다. 정씨와 유성철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같이 태어나 함께 성장한 절친한 친구였다.

    김일성은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정권 유지에 대한 불안감 등에 못 이겨 요직에 있던 고려인 등에 대한 추방을 단행했다. 정씨는 홍명희, 최승희 등 월북 문화인사들을 비호했다는 명목으로 추방됐다.

    그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사범대를 다녔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지역에서 교사를 했으며, 김일성 대학이 생기면서 러시아 문학부 부장으로 임명돼 세계 문학과 문학 원론을 가르쳤던 것이 월북 문화인사 비호의 증거로 제시됐다.

    김일성이 소련에서 대학을 나온 지식층인 고려인들이 언제든 정권을 찬탈할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숙청을 단행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428명의 고려인 중 48명이 학살당했고 정씨와 박창옥 부총리, 박영빈 노동당중앙위조직부부장, 기석복 인민군 중장, 전동혁 외무성 참사 등이 차례로 숙청됐다.

    정씨는 "나와 유성철 등 5명은 가장 먼저 추방당했다"며 "방학세 내무부장관, 김봉률 인민군 포병사령관 등 30명 정도가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지만 이들도 숙청됐거나 지금은 모두 죽었다"며 "428명의 고려인 중 생존자는 나뿐"이라고 했다. 유성철은 1995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사망했다.

    정씨는 북한을 떠나던 날 가깝게 지내던 오진우 소장은 보이지 않았고 최현 중장이 배웅을 나왔다고 했다. 북에서 숙청된 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이들에게 소련 당 중앙위는 "너희들이 소련에서 사는 것은 걱정 말고 돈도 명예도 부끄럽지 않게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환영했다.

    정씨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일보에서 기자생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생활하다가 지난 1월 딸들이 있는 모스크바로 이사했다. 정씨는 6·25 전쟁 59주년을 앞두고 "지금 북한 체제로는 잘살 수 없다며 한국 백성들이 북한 동포들을 잊지 말고 돕고 포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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