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114]

    입력 : 2009.06.03 03:24

    제10장 망국(亡國)의 전야

    이창순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중근의 가슴속은 이미 천길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해보는 일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이창순을 보고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대인(大人)의 풍도를 지키고자 그리하셨을 테지만, 나는 자식 된 도리로 그와 같은 일을 듣고도 어찌 참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서가 놈에게로 가서 잘하고 못한 것을 따져본 뒤 법사(法司)에 호소해서 그 패악을 바로잡도록 해야겠네."

    그러자 이창순도 중근의 말을 옳게 여겨 함께 따라나섰다.

    중근과 이창순이 찾아가자 청국 의사 서가는 두 사람의 기색을 보고 알아차렸던지 사나운 눈길로 맞았다. 그리고 채 몇 마디 따져 묻기도 전에 큰 칼을 빼어들고 중근의 머리 위로 내리치려 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중근이 서가에게로 바짝 다가들어 왼손으로 내리치려는 서가의 오른손을 막으며 오른손으로 권총을 빼어 서가의 가슴팍을 찔렀다.

    "이놈, 죽기 싫거든 어서 그 칼을 내려놓아라!"

    일러스트=김지혁

    중근이 그렇게 소리치자 겁을 먹은 서가는 칼을 내려치지 못했다. 중근의 친구인 이창순도 무골 기질이 있었다. 평소 지니고 있던 권총을 품고 왔다가 일이 급해지자 빼들고 공포 두발을 쐈다. 그 소리에 놀란 서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몸이 굳은 듯 서 있었고, 중근도 놀라 잠시 굳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창순이 달려와 서가에게서 칼을 빼앗더니 섬돌을 내리쳐 두 동강 내버렸다. 중근과 이창순이 각기 부러진 칼 한 토막을 집어 서가에게 내던지자, 기가 죽은 서가가 풀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중근이 권총을 거두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의원이 왜 진료를 받으러 온 환자에게 발길질을 하였는가?"

    그러자 서가의 눈길이 다시 사나워졌다.

    "언사가 불손한데다 감히 우리 대청(大淸)을 능멸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진맥하려고 방안으로 들 때 저희끼리 주고받는 말을 들으니, 안(安) 아무개라는 그 서학(西學)장이 놈이 나를 되놈이라 부르며 내 의술을 비웃고 의심하였다. 또 진맥을 받을 때도 술 냄새가 나기에 예의지국 조선은 의원에게 진맥을 받을 때도 술을 마시고 가느냐며 나무랐더니, 대청 북양함대(北洋艦隊)는 군함에 여자까지 태우고 다니며 싸웠다는데 뭘 그리 따지느냐며 비웃었다."

    그 말을 듣자 중근도 왜 그런 시비가 벌어졌는지 짐작이 갔다. 안태훈은 개화파를 자처하면서부터 반청(反淸) 감정을 키워왔다. 안태훈이 말하는 독립과 자주는 모두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자주를 뜻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안태훈의 반청감정은 혐오와 경멸의 수준으로 자라갔다. 북양함대가 군함에 사관들의 아내를 태우고 싸웠다는 얘기는 중근도 들은 적이 있었다.

    "북양함대 일은 사실이지 않으냐?"

    "너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북양함대의 해군들은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용감하게 싸울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안가 놈은 자결로 기함(旗艦) 정원호(定遠號)와 함께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정(丁:정여창) 제독까지 능멸하였다."

    청국 의사 서가가 다시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로 그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에 와서 개업을 하고 젊은 날을 보낸 서가였으나, 그래도 제 나라는 잊지 않고 그 돌아가는 사정을 꼼꼼히 살펴온 듯했다. 중근은 길게 말해봐야 서가가 쉽게 승복할 것 같지 않아 그자를 끌고 가까운 감영으로 갔다. 그리고 재판소로 넘겨 함부로 사람을 다치게 한 서가의 죄를 물으려 했으나 법관이 그 고소를 받아주지 않았다. 서가가 청나라 사람이라 조선의 법으로 재판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에 분을 풀지 못한 중근은 다시 서가를 끌고 안악 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이 그 일을 듣고 모여들어 중근과 이창순을 말리는 바람에 서가를 놓아주고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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