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인들이 시민권을 딸 목적으로 미군에 입대하는 열기가 뜨겁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WSJ)이 주요 뉴스로 보도해 눈길을 끌고 있다.
WSJ는 29일(현지시간) A섹션 1면과 8면에 최근 미군 당국이 입대자를 늘리기 위해 합법 비자 소유자가 미군에 입대할 경우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프로그램과 관련, 한인들이 소수계 중 가장 높은 신청률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LA에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 이석준씨(27)는 요즘 영업 부진과 투자비자 기간 만료로 고심하던 중 제임스 황씨가 미군 입대에 관해 소개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미군에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저널은 미 국방부가 시행하는 프로그램은 아랍어와 이란어, 한국어 등 중요 언어 능통자들을 활용할 목적으로 영주권이 없는 비자 소지자들이 군에 지원하면 일정기간 후에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당근정책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2월23일부터 이 프로그램이 시행된 이후 한인들은 무려 8000여명이 지원, 소수계 중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했고 덕분에 쿼터가 조기 마감됐다. 저널은 이들 대부분이 의약과 공학 학사를 갖고 있는 대졸자이며 이미 한국서 군대를 갖다온 예비역들이라고 말했다.
이번 모병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피터 배도니안 중령은 “한인 지원자들의 수준은 경이적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를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하나의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열기를 보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저널은 한국은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년 미국의 학교에 등록을 하고 소자본으로 창업하는 사람들은 임시비자를 갖고 입국하는 등 미국행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만 행정상의 관료주의로 지친 이들이 많다고 소개했다.
모병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황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와 함께 2001년 미국에 학생비자로 입국했다. 외과의 훈련을 받은 두사람은 전문직 비자인 H1-B비자로 전환했고 부인이 아들을 낳은 이후 2006년 영주권을 신청했다.
이민 당국이 부인의 영주권을 승인하는 기간은 8개월이 소요됐지만 황씨의 경우는 한없이 늘어졌다. 서류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영주권자가 시민권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5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황씨의 부인은 2007년 5월 미군에 입대해 시민권을 땄다. 위독한 아버지를 미국에서 모실 수 있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편은 영주권 수속을 진행하고 있다. 황씨는 “작년에 하도 지연되는 게 화가 나서 정부를 고소할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황씨는 임시비자 소지자가 미군에 입대하면 6개월 내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을 정부가 검토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정보를 모았다.
지난해 11월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이 같은 일년짜리 프로그램을 승인했고 황씨는 군입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정보들을 다른 한인들에게도 자세히 알려주기로 마음먹고 다음카페에 사이트(cafe.daum.net/USmilitary)를 개설했다.
그는 “나같이 미국에 꼭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 중에 이 프로그램을 잘 모르는 이들도 있기 때문에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모병프로그램을 신청하려면 미국에 합법비자를 갖고 2년 이상 체류한 사람이 입대 시 의무복무와 예비군 복무를 각각 4년씩 해야 한다.
황씨는 입대를 희망하는 이들을 위해 예상 시험문제들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클래스도 무료로 운영했다. 앞서 소개한 이석준씨는 이 클래스를 주 3회 다닌다면서 황씨가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숙제도 내줬다”고 말했다.
이씨는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2년 간 군복무를 했다”면서 “미군 복무가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입대시험에 나오는 수학 문제는 대수와 기하, 삼각함수이지만 “한국에서 중학교 때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영어였다. 그래서 황씨는 학생들에게 ‘플래시 카드’를 만들어 단어의 의미를 적고 맞추는 퀴즈식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 반에서 공부하는 유학생 양모(30) 씨는 “때로는 새벽 3시까지도 공부를 했다. 그래서 다음날 학교 수업시간에 졸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덕분에 한국인들은 모병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에 훤하다. LA 모병소에 근무하는 조슈아 캐논 하사는 “한인 지원자들은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놀라워했다.
이석준씨는 프로그램이 시행되자마자 지난 2월 뉴욕으로 날아와 서류를 제출했다. 출생증명서와 고교졸업장, 대학성적증명서와 함께 “발가락이 다 있냐?”, “피어싱한 곳이 있느냐?”는 등의 기초질문에도 답했다.
최종합격하기까지 뉴욕을 세 번 방문하면서 소요된 비용은 3000 달러. 그는 8월18일 소집훈련을 받는다. 소집병과는 치과 테크니션. 한편 메릴랜드에 사는 양씨는 아파치 헬리콥터 수리병과를 받았다.
미군이 최근 이 모병프로그램 모집 사무실을 LA까지 확장한 결과 최근 22명의 지원자 중 20명이 이 지역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LA 일대가 한인들의 최대 거주지라는 사실이 새삼 부각됐다.
한인들의 지원이 지나치게 쇄도하자 미군당국은 “파쉬툰어와 우루두어, 아랍어 통역병들도 필요하다”며 한인들의 지원서를 더 이상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황씨는 사이트 운영을 계속하면서 입대에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달 그는 입대가 확정된 십수명의 한인들과 함께 라스베이거스에서 축하 파티를 가질 예정이다.
입대축하 명단에는 당연히 그도 포함됐을까. 놀랍게도 아니다. 시험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황씨는 이번 모병프로그램이 시행되기 직전인 2월 초에 영주권이 발급됐다.
노창현특파원 robin@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