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자산(紫山) 중턱. 해발 280m로, 높지 않았지만 사람의 왕래가 끊긴 지 오래된 듯 험준했다. 가파른 소나무 숲 사이로 지름 4㎝의 적갈색 쇠말뚝이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땅 밖으로 드러난 길이만 70㎝가 넘었다.

"일제가 박은 쇠말뚝으로 결론을 내립시다." 쇠말뚝을 응시하던 소윤하(蘇閏夏·65)씨가 말했다. 20년 넘게 전국 30여곳에서 280개의 쇠말뚝을 뽑아온 '쇠말뚝 사나이'다. 지역 신문에 난 자산 쇠말뚝을 직접 검색해 찾을 만큼 그는 여전히 정력적이었다.

소씨와 주변 산세를 조사한 신상윤 아시아풍수지리연구소장은 "산맥의 기운이 남한강과 섬강의 합수(合水)머리에서 해치(해태) 형상을 이뤘는데 그 요추(腰椎) 부분의 혈(穴)에 쇠말뚝이 박힌 것"이라고 했다.

원선재 강천2리 이장은 "어릴 때 일제가 박은 쇠말뚝이라고 들었다"고 했고 주민 김승철씨는 "동네 어른들은 임경업 장군의 기를 꺾기 위해 박은 것이라고들 했다"고 말했다. 여주군사(史)에 따르면 임경업 장군이 자산 꼭대기에서 심신(心身)수련을 했다고 전해진다.

소씨가 쇠말뚝을 처음 접한 건 1984년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쇠말뚝을 뽑았다는 한 산악회 소식을 듣고 나서다. 20대부터 민속 종교를 연구했던 소씨는 "이거야말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설악산부터 전남 여수의 무인도까지 전국의 쇠말뚝을 찾아 헤맸다. 제보를 받으면 동네 구전(口傳)조사를 먼저 했다. 풍수학자로부터 일제가 박은 쇠말뚝의 근거를 찾는 일도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일제가 박은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그는 '미관상' 쇠말뚝을 뽑았다.

단체의 이름을 걸고 쇠말뚝을 뽑기도 했지만 소씨는 늘 혼자였다. 주변에서는 "전국 떠돌아다닐 여력으로 막노동이라도 하라"고 했다. '한일 관계의 걸림돌'이라거나 '터무니없는 미신'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많았다.

소씨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다"며 "그런 사람들은 현장에서 쇠말뚝이나 한번 잡아보고 말했으면 싶다"고 했다. 그는 "아는 게 병"이라며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기에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식당 일 하면서 지금까지 가사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에요. '가야 되는데… 가야 되는데…' 하면 집사람이 용돈 얼마씩을 챙겨 줍니다. 제보받고 나면 집에 붙어 있질 못하는 걸 알거든요."

박국희 기자 25년 동안 전국을 돌면서 쇠말뚝을 뽑아온 소윤하씨는“아픈 사람도 침을 맞고 나면 낫듯이 쇠말뚝을 뽑으면 우리 강산도 더 건강해지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는 1970년대 유리 제조회사와 냉난방 설비회사를 제외하곤 딱히 돈 버는 일을 해보지 않았다. 큰아들(36) 결혼식에도 돈 한 푼 보태주지 못했다. 15년 넘게 경기도 과천의 33㎡(10평) 반지하 월세 방에서 생활하는 처지다.

1995년 일본인으로부터 전남 진도 앞바다에 쇠말뚝이 박혀있다는 제보를 받았을 때는 바다속을 헤집느라 누나에게 빌린 주택 자금 5억원을 쏟아 부었다. 성과는 없었고 엉뚱하게 보물이 묻혔다는 소문만 돌았다. 이곳은 2000년 이용호 게이트의 주무대가 됐다.

현재 소씨가 전국으로부터 받아 놓은 쇠말뚝 제보가 51건. 교통비와 탐사비 등의 사정으로 쌓아 두고만 있다. 소씨는 "이것만 다 해결해도 남한 내 웬만한 쇠말뚝은 다 뽑힌 것"이라며 "탈북자들이 제보한 금강산 등 북한 내 쇠말뚝을 뽑는 게 마지막 희망"이라고 했다.

"죽을 때까지 쇠말뚝을 뽑을 것"이라는 소씨는 그동안의 자료를 모아 책을 낼 계획이다. 단 쇠말뚝 뽑은 위치는 비밀이다. 위치를 알면 누군가가 그 자리에 똑같이 쇠말뚝을 박을까 싶어서다. 그의 집에 쌓인 쇠말뚝만 100여개. 전국 지자체에 나눠주고 남은 것이다. 그는 쇠말뚝을 한데 녹여 종(鐘)을 만들 생각도 하고 있다. 아픔의 역사를 종 표면에 기록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