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 안중근 불멸] [96]

조선일보
    입력 2009.05.08 03:04 | 수정 2009.05.18 01:34

    제8장 복사(服事) 안다묵

    안태훈이 독립협회의 황해도 지회(支會) 설립을 방해한 것은 궁극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그 본부의 정치노선 때문이었다. 아직도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 개화파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안태훈에게는 독립협회의 활동이 급진적이고 과격해 불온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안태훈의 그런 사상적 한계는 중근에게도 적용되어 그때까지도 중근은 서울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변혁의 흐름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대한제국의 신참구본(新參舊本:새로운 것을 참고하고 옛것을 본보기로 함)을 내세운 광무(光武)개혁이 있었고, 절대군주권의 강화를 위한 병제(兵制) 개편이 잇따랐다. 그리고 만민공동회와 황국협회의 충돌을 구실로 독립협회를 해산했다가, 만민공동회의 요구에 따라 독립협회의 부설(復設)이 허용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서울과 조정의 그런 혼란은 빌렘 신부와 안태훈에게는 각기 추구하는 바를 성취하고 획득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빌렘 신부는 급속히 불어나는 교세에 따라 황해도 여러 곳에 본당을 열고, 여덟 명의 신부들을 불러들여 황해도를 조선에서 가장 전교가 활발한 교구로 이끌어갔다. 빌렘 신부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던 황해도 여러 고을의 관장(官長)들은 새로 불어난 그들 여덟 양대인(洋大人)들과 그들을 등에 업은 천주교 신자들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나중에 이른바 해서교안(海西敎案)이란 이름으로 터질 심각한 외교 분쟁은 그때 이미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안태훈도 전형적인 자세(藉勢)교인으로서 빌렘 신부와 불란서 공관의 힘을 등에 업고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호족활동을 펼쳤다. 이제 청계동은 빌렘이 쌓아올리고 있는 조선 천주교의 보루인 동시에 안태훈이 다스리는 작은 양산박이었다. 안태훈은 거기에 말기 왕조의 썩은 관리들이 자행하는 폭압과 착취로부터 벗어난 해방구를 열고, 자기 밑에 든 백성들의 호민관(護民官)을 자임하였다.

    일러스트= 김지혁

    중근은 여전히 빌렘 신부의 복사로 그의 공격적인 전교여행을 수행했지만 한편으로는 교민회 총대(總代)란 직함으로 아버지 안태훈의 호족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어떤 때는 한 몸으로 그 두 가지 역할을 함께 담당했는데, 신천 금광의 감리(監理) 주가(朱哥)와의 충돌은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주가는 신천에서도 금 산출량이 가장 많은 금광의 감리로서 거느린 광꾼만도 4~5백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위인이 광폭하고 존귀한 것을 두려워할 줄 몰라 까닭 없이 천주교를 비방하고 다니니, 전교에 여간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에 중근이 청계동 본당 교인들의 대표가 되어 주가를 달래러 가게 되었다.

    광산을 찾아가 처음 주가와 만났을 때만 해도, 중근은 빌렘 신부의 복사로서 천주교의 가르침 안에서 일을 해결해 보려 했다. 좋은 말로 이치를 따지며 주가의 부당함을 깨우쳐주려 했다. 하지만 주가가 워낙 완악한 데다 중근의 나이 젊은 걸 깔보아 도무지 그 말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몇 마디 꺼내기도 전에 언성을 높여 오히려 중근을 욕하니, 금세 자리는 험악한 싸움판으로 변해갔다.

    양쪽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투가 거칠어지자, 그 소리를 듣고 광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4~5백 명이나 몰려든 광꾼들은 감리인 주가에게 아첨을 겸하여, 시비도 가려보지 않고 중근을 두들겨 패려 했다. 저마다 몽둥이와 돌멩이를 집어 들고 몰려오는데 그 기세가 몹시 흉흉했다.

    원래 중근은 먼 길을 나설 때 전에 아버지 안태훈에게서 받은 영국제 권총을 품에 지녔으나, 그날은 명색 전교(傳敎)와 관련된 길이라 허리춤에 숨기고 있는 것은 단검 한 자루뿐이었다.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우니 우선 그 단검이라도 써서 눈앞의 화를 면하는 길밖에 없었다. 광꾼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려 들자 중근은 오른손으로는 얼른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고 왼손으로는 주가의 오른손을 잡으며 큰소리로 꾸짖었다.

    "비록 네가 백만 명을 거느렸다 해도 오늘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 알아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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