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이야기] 반세기만에 '대장 아버지' 백선엽 장군 찾은 그들

조선일보
  • 채민기 기자
    입력 2009.05.02 03:02 | 수정 2009.05.02 15:40

    51년 '빨치산 토벌작전' 중 장군이 세운 육아원서 자라
    원생 중엔 빨치산 자녀도 "집 불타고 가족 잃었지만 우릴 살려준 분 원망 못해"

    1일 낮 12시, 환갑을 넘긴 남녀 11명이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얼굴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군사편찬연구소에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백선엽(89) 전 육군참모총장이 가슴 뭉클한 눈빛으로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노인들이 그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장 아버지', 건강하시죠?" 백 전 총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인들이 '대장 아버지'라고 부른 백 전 총장은 33세의 나이에 별 네개의 대장 계급장을 단 전설적인 전쟁영웅이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그는 포연을 뚫고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휘하는 31세의 청년 장군이었다. 그는 격전의 와중에 오갈 데 없이 눈밭(雪)에 버려진 코흘리개 전쟁고아들을 거둬 육아원을 세웠다. 양민 자녀도 있었지만 빨치산 자녀가 더 많았다. 백 전 총장은 전남도청에 요청해 광주광역시 교외 송정리에 있는, 일본인이 버리고 간 병원 건물을 넘겨받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백선 육아원'을 열고 부모 잃은 아이 300명에게 지붕과 끼니를 줬다. 소식을 들은 미(美) 군사고문단에서 후원금을 보내왔다. 광주 상무대 장병들과 전남도청 직원들, 기독교 단체 선명회도 정성을 보탰다.

    환갑을 훌쩍 넘긴‘전쟁고아’들은‘대장 아버지’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선회 회원들이 50여년 만에 만난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이날 만남은 이 육아원에서 자란 이들이 반세기 만에 은인(恩人)을 찾아온 자리였다. 10여년 전부터 '백선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이들은 백 전 총장의 근황이 실린 신문기사를 보고 '대장 아버지'를 함께 만나기로 했다.

    전남 화순 출신인 최봉자(여·67)씨는 낮에는 국군이 수십명씩 밥을 먹고 가고 밤에는 중공군 모자를 쓴 빨치산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마을에서 자랐다. 최씨는 "토벌작전 때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몰려 국군에 총살당했다"며 "온 마을이 측간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탔다"고 했다. 육아원에 들어온 최씨에게 백 전 총장은 "너희 마을을 불태운 것은 바로 나"라고 말했다.

    "대장 아버지가 그랬어요. 빨치산이 너무 많아 어쩔 수 없이 명령했다고…. 원망은 하지 않았어요. 육아원 바깥 아이들이 고무신도 못 신을 때 우리는 구두를 신었어요. 배를 주리지도 않았고요. 제가 고등학교까지 마친 것은 장군님이 세운 육아원 덕분이에요."

    광주 상무대 비행장에 도착한 백선엽 장군을 환영하는 백선육아원 어린이들./신의일씨 제공

    보험회사에 근무하다 은퇴한 최씨는 "내겐 아버지가 세 분 있는데 낳아주신 아버지, 육아원장, 그리고 여기 계신 대장 아버지"라고 했다.

    백 전 총장은 북진하는 국군을 지휘하며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지리산을 떠난 뒤에도 그는 틈날 때마다 별 네 개 달린 군모에 전투복 차림으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광주 상무대 비행장에 내려오곤 했다.

    육아원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복사기 부품 회사에 근무하다 은퇴한 박대순(64)씨는 "대장 아버지가 광주에 내려올 때면 아이들이 서로 마중 가려고 난리가 났었다"고 회고했다.

    "저는 다섯 살 때 고아가 됐어요. 아버지는 유엔군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어린 저를 품에 안은 채 퇴각하는 인민군을 피해 달아나다 인민군 총에 맞았어요. 저고리에 새빨간 피가 물들던 기억이 생생해요. 오갈 데 없는 제가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대장 아버지 덕분이에요."

    휴전 후, 백 전 총장은 원생들을 서울에 데려다가 남산도 보여주고 창경궁(당시 창경원)도 보여줬다. 자택에 불러 따뜻한 밥도 먹였다. 많은 원생들에게 백 전 총장이 주는 밥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받는 '가정의 밥상'"이었다.

    백 전 총장은 전후에도 육아원 운영을 계속 후원하다 1988년 육아원 시설 전체를 천주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기증했다. 수녀회는 육아원 부지와 건물을 처분해 광주광역시 삼거동에 정신지체 어린이 보호시설 '백선 바오로의 집'을 지었다.

    이날 백 전 총장은 백선회 회원들을 맞아 미리 스캔해둔 오래된 흑백사진을 사무실 벽면에 걸린 대형 모니터에 띄웠다. 열 살 안팎의 꼬마 50여명이 육아원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백 전 총장이 "다들 자기가 어디 있나 찾아보라"고 했다. 노인들은 저마다 사진 속 얼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갔다. "이게 나 같기도 하고…." "워낙 오래돼서 모르겠는데." "아, 이게 나야!" "자기 얼굴 찾은 사람은 '심 봤다'라고 외쳐."

    일행은 전쟁기념관 웨딩홀로 자리를 옮겨 조촐한 점심을 먹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백 전 총장과 백선회 회원들은 저마다 두 손을 모았다. 끼니때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니"로 시작하는 '식사송'을 외우던 육아원 시절 같았다. 백 전 총장은 한때 코흘리개 꼬마였던 노인들을 둘러보며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자"고 기도했다.

    백선엽 전 육군대장이 6.25 전쟁당시 전쟁고아들을 위해 세운 백선육아원 원생들과 50여년만에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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