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1300년 전 통일신라시대의 일이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관장 최병현)에선 이 진술이 '참'이다. 이 박물관에는 '경주에서 출토된 서기 8~9세기의 기독교 유물'이라는 설명이 붙은 소장품이 네 점이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1950년대 경주에서 출토됐다는 '성모(聖母) 마리아상(瑪利亞像)'이다. 높이 7.2㎝의 이 소상(塑像·찰흙으로 만든 형상)이 중국에서 신라로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이다. 얼핏 관세음보살상처럼 보이는 이 소상은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성스러움을 드러내기 위해 몸 뒤에 표현한 장식) 같은 형상이 더욱 불상 같은 분위기를 풍기지만 불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물을 자세히 보면 화관(花冠)으로 머리를 장식한 여인이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아이를 무릎 위에 안고 있는 형상을 볼 수 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는 게 박물관의 해석이다.
함께 전시된 유물은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높이 24.5㎝의 '돌 십자가' ▲원형과 십자가 형태가 어우러진 동제(銅製) 십자무늬장식 ▲화살촉 모양의 십자무늬장식이다. 박물관은 일제시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에서 나왔으나 지금은 사라진 '발해 삼존불'의 사진도 전시했는데, 세 부처 중 왼쪽에 있는 부처는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박물관측은 일찍이 동양에 전파된 기독교의 한 유파인 경교(景敎)의 산물로 본다. 경교는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를 말한다. 이 교파는 서기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이후 페르시아 등 동방으로 전래됐다.
7세기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경교는 매우 국제적이고 개방적인 문화 풍토를 지녔던 당(唐)나라 조정의 환대를 받았다. 경교는 이후 150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크게 유행했다. 이때 경교가 신라에까지 전파됐을 가능성이 큰데, 바로 이들 유물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경교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볼 때 성모상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몰린 이유 중 하나가 성모의 신성(神性)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박물관의 한명근 학예연구원은 "7~8세기에 중국에까지 온 경교가 4~5세기 유럽에서 지니고 있었던 초기의 교리를 그렇게 철저하게 유지하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유물들은 한국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매산 김양선(金良善·1907~1970) 선생이 수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고학 전공자인 최병현 관장(숭실대 사학과 교수)은 "김 선생 생전에 본인으로부터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밑에서 돌십자가를 발견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2004년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재개관하면서 이 유물들의 존재가 알려지자 일부 불교계 인사들로부터 '절에서 기독교 유물이 나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의를 받았다고도 했다.
최 관장은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의 불상은 없다"며 "당시 중국의 경교 선교사들은 목탁을 두드리며 예배를 보는 등 불교와 융합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모상을 불상처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라 성모상'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정수일(일명 무하마드 깐수)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처럼 "고대 기독교 전래의 유력한 증거물"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지만 상당수의 문화재 전문가들은 '기독교 유물'이라는 데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강우방 전 이화여대 교수(미술사학)는 "워낙 모호한 성격의 유물이어서 나도 시대나 성격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성모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정확한 발굴기록이 없는 유물로 신라 때 것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본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성모상을 관음보살상의 형태로 만들었던 '성모관음상'처럼 이것은 혹시 근대에 만들어진 유물은 아닐까? 이에 대해 최병현 관장은 "만약 그렇다면 박물관 문을 닫아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최 관장은 "종교로서 들어온 것인지 문화로서 들어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성모상과 십자가인 것이 확실하다면 이미 신라 때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와 불교의 종교 화합이 이뤄지고 있었던 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