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데스크] 유머 만점 독서 캠페인

입력 2009.04.16 23:29 | 수정 2009.04.20 09:32

김태훈 문화부 차장대우
독일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장편 '책 읽어주는 남자'는 문맹(文盲)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은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는 이유로 전범 재판에 선다. 글을 모른다는 것만 고백해도 혐의를 벗을 수 있었지만 여인은 관련 보고서를 자신이 썼다고 인정한다. 문맹이란 사실이 드러나는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감옥에서 썩기를 선택한 것이다.

무식에 대한 수치심은 때로 자기파괴마저 무릅쓰게 할 만큼 강렬하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식자(識者)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독서 이력을 경쟁하듯 밝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70년대 영국 시단을 풍미한 '화성인 시'(Martian Poetry) 운동을 주도한 시인 크레이그 레인(Raine)은 옥스퍼드대학의 입학 인터뷰 담당 패널까지 지낸 당대의 지식인이다.

그는 최근 한 신문에 "나는 돈키호테를 읽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다"고 공개했다. 영국 보수당 의원을 지낸 에드위나 커리(Currie)라는 이는 한술 더 떠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표지도 만져본 적이 없지만 남들도 읽지 않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아는 척하고 다녔다"는 독서 고해성사까지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콘스탄스 브리스코(Briscoe)는 '명작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한 평생교육'이라는 강좌 참가 경험을 고백했다. "강사가 카프카의 '심판'을 읽었느냐고 묻기에 '못 읽었다'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둘러보니 사람들이 몽땅 나와 같은 표정이더라."

영국의 명사들이 이처럼 양심고백을 하고 나선 이유가 재미있다. 다음 주로 다가온 '세계 책의 날'(23일)을 맞아 벌이는 독서 캠페인인 것이다. 책을 읽으라고 강권하기보다는 일상의 친숙한 화젯거리로 제시하는 힘 빼기 독서 운동이다.

책을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는 설문 결과도 내놨다. 영국인 13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거짓말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무려 65%에 달했다.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었다고 거짓으로 대답한 책 1위는 조지 오웰의 '1984'였다.

미국의 독서 캠페인에서는 피자가 등장했다. 미국 국가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이 주관하는 독서 운동인 '빅 리드'(Big Read)는 1개 도시가 책 1권을 선택해 함께 읽는 행사로 해마다 200여곳에 이르는 도시가 참가한다. 그런데 올해 '빅 리드' 프로그램 책임자인 데이비드 키펀(Kipen)이라는 사람이 오하이오주의 한 마을 주민들에게 색다른 제안을 했다.

"마을 성인 중 단 한명이라도 책 읽기에 낙오하면 내가 그 책을 통째로 씹어먹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종이 먹는 염소가 될 위기에서 나를 구해준다면 답례로 마을의 모든 주민에게 피자 한 판씩을 돌리겠다"고 약속했다. 이 도시가 선택한 책은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다. 성인 128명 가운데 최근까지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70명 선에 머물자 나머지 주민들의 책 읽기를 독려하기 위해 내놓은 재치 만점의 아이디어다.

한국출판연구소가 지난해 가을 발표한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과거 1년간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성인은 23.3%로 조사됐다.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답한 '위장 독서가'까지 포함하면 실제 수치는 더 클지도 모른다. "내 취미는 독서"라고 하면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필수"라고 강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진지한 접근보다 '피자 한판' 같은 공약이 위장 독서가를 줄이는 현실적 방법일지도 모른다. '세계 책의 날'도 책을 읽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낭만적인 전통에서 시작됐다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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