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서울 풍경들… 훗날 그리울겁니다"

조선일보
  • 김동현 기자
    입력 2009.04.16 02:39

    건축가 조정구씨 서울 도심 '수요 답사' 10년째
    개발에 밀려난 옛 정취 사진 16만장에 담아…
    "골목길·달동네·쪽방촌엔 '서울의 DNA' 담겨있어 흔적없이 지워져선 안돼"

    건축가 조정구(43·구가도시건축연구소 대표)씨는 매주 수요일 아침 카메라와 서울 도심 지도 한 장을 들고 집을 나선다. 서울 사대문 안팎의 옛 골목과 '달동네'를 답사하기 위해서다. 2000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단 한 주도 빼먹은 적이 없다. 수요일에 일이 생기면 금요일에 답사했다. 햇수로는 10년째, 횟수로는 400회를 넘어섰다.

    그는 현대식 한옥으로 주목받고 있는 건축가다. 2002년 서울 가회동 북촌 한옥마을 재개발에 참여했고, 2005년에는 경주시 신평동에 있는 국내 최초의 한옥호텔 '라궁(羅宮)'을 설계해 2007년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 대상을 받았다. 인기드라마 '꽃보다 남자' 촬영장으로도 쓰인 곳이다. 그는 "내가 이룬 성과가 있다면 모두 '수요 답사' 덕분"이라고 했다.

    조씨는 IMF 직후에 건축사무소를 차렸다. 경험 없는 건축가에게 들어오는 일은 적었다. 그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일감을 기다리는 대신 카메라를 들고 '도시 공부'를 하러 거리에 나섰다.

    국내 최초의 한옥 호텔‘라궁’을 설계한 건축가 조정구씨가 지난 3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그는 지난 10년간 한 주도 빠짐없이 동료·학생들과 함께 서울의 옛 시가지, 달동네를 답사해왔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그는 종묘나 경복궁과 같은 명소보다 허름한 동네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곳에 '별천지'가 숨어 있었다.

    "왕십리에 가면 6·25 전쟁 통에 건물 외벽만 남은 봉제공장이 있어요. 2002년에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보니 뻥 뚫린 지붕 아래 슬레이트 집 17채가 다닥다닥 붙어있었어요."

    젊은 건축가의 눈에 비친 서울은 '자생력의 보고(寶庫)'였다. 가파른 산중턱을 깎아 계단을 만들고 주택을 세운 이화동과 명륜동, 옛 기찻길 주변에 일렬로 달라붙은 서교동 365번지 상점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쪽문이 50㎝ 간격으로 이어진 돈의동 쪽방촌…. 조씨는 서울 곳곳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도시의 단면을 목격했다.

    조씨는 답사 내용을 사진과 글로 꼼꼼히 정리했다. 함께 답사하겠다는 직원들과 역할을 나누면서 기록은 갈수록 체계화됐다. 왕십리의 봉제공장터처럼 재개발이 예정된 곳은 아예 실측을 해서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제작했다. 10년간의 답사 기록은 6㎝ 두께의 A3 크기 스크랩북 9권에 모아뒀다. 지금껏 찍은 사진만 16만장이 넘는다.

    조씨는 10년간 도심 답사를 하면서 수많은 재개발 지역을 목격했다. 그는 도심 재개발에 대해 "주민들의 경제논리가 첨예하게 얽힌 문제라 쉽게 찬반을 결정할 수 없지만, 무작정 고층 아파트를 짓는 개발은 주민에게도, 서울시에도 손해"라고 했다.

    "경복궁 서쪽에 있는 종로구 체부동에서 빗자루로 골목을 쓸던 50대 아저씨가 생각나요. 아들자식 다 키워 장가까지 보낸 동네라서 정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본인은 재개발을 원치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폐가 될까 봐 재개발에 찬성했다고 했어요."

    건축가 조정구씨가 지난 2월 촬영한 서울 체부동 골목길/구가도시건축연구소 제공
    조씨는 서울 시내의 오래된 건축물들이 '화이트보드 지우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대문 안에는 아직 '서울의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많아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나이테처럼 기록된 동네들이죠. 이걸 무조건 갈아엎는 건 곤란해요. 개발을 아예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대규모 재개발보다 부분적 리모델링이 낫다는 거죠."

    2007년부터 조씨의 일을 거들고 있는 일본인 요네다 사치코(여·28)씨도 "서울이 일본의 교토(京都)처럼 옛 도시의 정취를 살릴 수 있게 개발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씨는 "수요 답사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서양에서 건너오는 현대 건축의 유행을 좇기에 급급했을 테고, 반대로 고려·조선시대 한옥만 연구했다면 현대식 한옥은 시도조차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도심 답사를 하면서 현대사를 겪으며 한옥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

    장차 서울의 옛 풍경을 본뜬 한옥마을을 서울 외곽에 짓고, 지금까지의 답사 내용을 엮어서 책을 펴내는 것이 조씨의 꿈이다.

    2006년 7월 촬영한 서울 서교동 기찻길 옆 상점가 모습. 그는 서울 사대문 안 오래된 동네를 기록해서 현대식 한옥을 짓는 자양분으로 삼았다./구가도시건축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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