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알았었다. 그러나 내가 속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나의 주인이 되어 버렸고, 주인으로 군림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코 꿈을 좇던 그때의 처녀 양숙씨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제일 무서워했던 훈육 주임을 닮았다고나 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난 1994년 나왔던 이 책은 2002년에 다시 복간되기도 했다. 이 책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를 흠모하다가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했고, 이 땅의 보통 남자들처럼 부인에게 '쥐여사는 남편'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2002년 민주당 경선 시절 노무현 후보는 장인의 좌익 경력에 대한 공세가 거세자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는 말로 난국을 정면 돌파했다.
경쟁자들과 반대 세력들은 뒤늦게 "본질을 흐리는 쇼"라고 몰아붙였지만, 이미 부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은 그의 비장한 표정과 어우러지며 국민의 감성을 건드린 뒤였다. 당시 야당의 경선 과정에 별 관심이 없던 주부들이 '진짜 남자'라며 호감을 보였고, 애꿎은 남자들은 "당신은 날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부인들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당사자인 권 여사도 "이 한마디가 정치인 아내로서 겪어온 모든 고통을 보상해 줬다"며 감격했다.
권 여사는 당초 남편의 정계 입문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편이 정치에 뛰어든 이후에도 좀처럼 정치판에 나서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책에 '여보, 나 좀 도와줘'라는 제목을 단 것도 권 여사가 워낙 정치에 소극적인 까닭이었다.
권 여사는 2002년 12월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기자들과 만나 "남편이 정치를 시작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그 초심을 지키는 데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권 여사가 지난 7일 남편으로부터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하고 받아서 사용한 당사자'로 지목받았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정상문 전 비서관이 돈을 받은 혐의로 수사받는 것과 관련, "저의 집에서 부탁하고 그 돈을 받아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7년 전 "(아내 때문에)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겠다"고 소리쳤던 노 전 대통령이 끔찍이 아끼던 부인에게 '총대'를 메라고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은 12일 또다시 '해명과 방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는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참 부끄럽고 구차하다"면서도 "부끄럽고 민망스럽고 구차스러울" 해명과 방어를 계속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요즘 국민은 '도덕성' 운운하던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버젓이 '뒷돈'을 받아 챙겼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법적인 책임을 면할 요량으로 부인 뒤로 숨는 '비겁한 남편'의 모습에서 허탈함마저 느끼고 있다. 어쩐지 범죄를 저지른 뒤 "나 대신 네가 가면 형량도 줄고, 잘하면 처벌을 면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결하는 조직폭력배들의 수법과 닮은 것 같아 입맛이 더욱 씁쓸하다.
입력 2009.04.14. 23:07업데이트 2009.04.14.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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