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디자인 도시를 표방하면서 가장 먼저 들고 나온 문제는 간판 공해였다. 건물의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덕지덕지 붙은 흉물스러운 간판이 서울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였다.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인 저자는 간판과 관련, 흥미로운 통계 하나를 내민다. 서울의 상업지역 면적은 전체의 3.9%로 주거지역(49.7%)과 녹지(41.8%)에 비해 훨씬 좁다는 것이다.
간판을 붙이는 상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간판이 서울을 대변하는 이미지처럼 다가오는 까닭은 뭘까. 저자는 근린생활시설(상가건물)이라는 독특한 우리의 상업 공간에서 답을 찾는다. 대로에 늘어선 한국의 상가건물은 '지하 노래방, 1층 약국, 2층 학원, 3층 교회'식으로 세속적인 공간과 성스러운 공간이 뒤엉켜 있으면서, 각각의 공간이 아우성치듯 건물 전면으로 간판을 내건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복잡한 간판은 단순히 시각적인 디자인 문제가 아니라 도시와 건축물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이다.
책은 '건축'이라는 배우가 서는 무대인 '도시'에 대해 말한다. 수십개 동서고금의 도시가 등장배우로 나와 '도시와 건축의 딜레마'라는 줄거리를 보여주지만, 오롯한 주연 배우는 서울로 대변되는 한국 도시다. 서울의 궤적을 다른 도시와 비교하고, 그 사이 복잡한 건축용어와 건축개념도 용해시켰다. 그래서 건축으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인 동시에 건축개론서 같다.
한옥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북촌은 팔라초(palazzo·르네상스 때 지은 붉은 기와집)가 군집해있는 피렌체와 비교된다. 건축물과 도시가 공유하는 '집합'의 질서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파리의 중층 도시 건축, 런던의 타운 하우스, 뉴욕의 마천루, 샌프란시스코의 내받이창(bay window)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건물과 건축이 혼재돼 '혼돈의 도시'가 된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은 날카롭지만 차갑지는 않다. 한국의 현대 건축이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와 혁신적인 내부공간'을 지향했던 서구의 근대 건축을 어설프게 흉내내다가 결국 '잡종적 형태와 진부한 내부공간'을 대량 양산했다는 데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서울이 가진 혼성(混成)의 풍경은 역사의 흔적이며 이 또한 우리의 문화"라고 강조한다.
국적 불명의 '잡종(雜種) 건축의 전시장'이 된 서울을 변모시킬 해법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점의 모델'이 흥미롭다. "거대 건축과 소형건축, 상업 건축과 아파트의 양극 사이에 있는 좁고 불완전한 중간지대에 문화적 상상력을 충전할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고 이들을 도시에 작은 파장을 형성해 나가는 진앙으로 삼자"는 것이다.
책의 미덕은 방대한 자료 수집이다. 건축은 특성상 이론을 통한 이해보다는 사례를 통한 경험적 이해가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저자가 촘촘히 배합해둔 사례들이 꽤 유용하다. 다만 저자 스스로 밝히듯 서양과 동양, 도시와 건축의 불균형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려다 보니 두 갈래의 이질적인 이야기가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순차적으로 읽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관심 있는 장부터 발췌독하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