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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만물상] 서애와 학봉

  •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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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 2009.04.01 23:09 | 수정 : 2009.04.03 09:38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다 "내가 어떤 임금인가" 물은 일이 있었다. 정이주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堯舜)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 같은 명군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중국 고대의 두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곁에 있던 류성룡이 거들었다. "김성일이 말한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니 전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조는 그제야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했다.

    ▶안동 출신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300여 제자 중에서도 우뚝한 두 봉우리였다. 서애보다 네살 많은 학봉은 매사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학자 타입이었다. 서애는 화합과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 면모가 강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나자 조정에서 학봉을 탄핵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봤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서애는 '징비록'에서 "학봉 역시 전란 조짐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변호했다.

    
	[만물상] 서애와 학봉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죽은 뒤 세상은 둘을 갈라놓았다. 1620년 퇴계를 모시는 호계서원에 제자들도 함께 배향하면서 퇴계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가 문제가 됐다. 서애 쪽에선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쪽에선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이 앞서야 한다고 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서애의 위패는 병산서원, 학봉의 위패는 임천서원, 스승인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에 모시게 됐다. 1805년 서울 문묘에 서애와 학봉을 모시려 할 때도 양쪽에서 서로 서열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없던 일로 한 일이 있다.

    ▶학봉과 서애의 서열 논쟁은 걸출한 선비가 많아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불리는 안동 유림에서 골치 아픈 난제 중 하나였다. 그 바탕에는 학문을 둘러싼 집안과 제자들의 자존심, 당쟁과 연결된 정치적 입장 차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올해 안에 착수할 호계서원 복원을 계기로 학봉의 의성 김씨 가문과 서애의 풍산 류씨 가문이 위패의 서열에 합의했다고 한다. 퇴계 왼편에 서애, 오른편에 학봉을 모신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400년 만의 화해가 조상들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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